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딛고 설 곳 없는 자유라니, 이 얼마나 순진한 잠꼬대인가

등록 2021-08-23 04:59수정 2021-08-23 10:20

[거대한 100년 김수영] ⑭자유
“시는 나의 닻이다”
돛뿐인 시의 항해 경계
정치적인 금기어까지
시 안으로 끌어들인 채
언론 자유를 갈구했다
김수영 산문 ‘시의 뉴 프런티어’ 육필초고 첫 장.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원래 제목이 ‘내가 생각하는 시의 뉴 프런티어’였음을 알 수 있다. 김현경 제공
김수영 산문 ‘시의 뉴 프런티어’ 육필초고 첫 장.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원래 제목이 ‘내가 생각하는 시의 뉴 프런티어’였음을 알 수 있다. 김현경 제공

‘詩(시)는 나의 닻(錨)이다.’ 서양화가 김주영이 1956년에 그린 김수영의 초상화에 적혀 있는 글귀다. 시인이 이 문장을 좌우명처럼 여겼다는 이야기를 그의 작고 50주년 헌정 산문집을 기획할 때 처음 들었다. 조금 의외였다. 왜 시가 돛이 아니라 닻일까…. 배는 돛을 펼쳐 바다로 무한한 자유의 항해를 떠난다. 돛은 배의 날개다. 그러니 문학의 모험에는 돛의 비유가 더 어울릴 것이다. 스테판 말라르메는 돛에 대한 매혹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썼다. “어느 것도, 눈에 비치는 낡은 정원도,/ 바다에 젖어드는 이 마음 붙잡을 수 없으리./ (…) / 나는 떠나리라! 그대 돛대를 흔드는 기선이여/ 이국의 자연을 향해 닻을 올려라!”(‘바다의 미풍’)

시인들의 일이란 닻을 끌어올려 육중한 존재의 무게를 벗어버린 채 가볍게 출발하는 것이다. 그들은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등장하는 벌킹턴처럼 살아간다. 벌킹턴은 뭍에 올라오면 땅이 자신의 “발을 태우는” 것 같아 잠시도 못 견디고 바다를 향해 떠난다. 하늘로 끝없이 솟아오르다 추락하는 이카루스처럼 결국 바다에서 실종되는 벌킹턴. 문학은 이 인물들을 통해서 어떤 참담한 실패도 무한 자유에 대한 열망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김수영은 이를 경계한다. 저들의 실패는 자유의 조건에 대해 더 많은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그는 자유란 거주를 조건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땅에 거주하려면 뿌리가, 물 위에 거주하려면 배에서 나온 뿌리인 닻이 있어야 한다. 그는 이 좌우명을 되새기며 닻을 내리고 올릴 수 있는 사상의 근력을 키우겠다고 다짐했으리라. 이런 다짐 때문인지 다른 시인의 비유에 시비를 걸기도 한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푸른 하늘을’). 새의 비상에 감탄만 하는 마음은 돛만 있는 배를 찬양하는 것처럼 순진한 일이다. 배가 정박할 능력 없이 바다를 떠돌기만 한다면 그것은 항해가 아니라 헤매는 것이고, 우리는 선원이 아니라 난파선에 실려 가며 자유롭다고 잠꼬대하는 자들이다.

그런 순진함에 거리를 두며 그는 말한다. “무엇이 달라져야 할 것인가? 언론자유다. 1에도 언론자유요, 2에도 언론자유요, 3에도 언론자유다. 창작의 자유는 백 퍼센트의 언론 자유가 없이는 도저히 되지 않는다.”(‘창작 자유의 조건’) “자유가 없는 곳에 무슨 시가 있는가!”(‘자유의 회복’)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이, 그가 시민이 누려야 할 언론의 자유와 시인이 누려야 할 창작의 자유를 둘 다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큰 미덕이다. 어느 나라의 문학사에서든 좋은 시인이면서 부끄러운 시민이었던 사례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니까. 하지만 그의 진정한 미덕은 창작의 자유를 언론의 자유와 연결시킴으로써, 문학의 자유를 공동체에서의 거주의 자유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시의 뉴 프런티어’ 육필초고 둘째 장. 김현경 제공
‘시의 뉴 프런티어’ 육필초고 둘째 장. 김현경 제공

시인은 “김일성 만세”를 외치는 불온사상을 인정하는 것이 언론 자유의 출발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우기는 다른 문인의 말 때문에 “나는 잠이 올 수밖에” 없다(‘“김일성 만세”’). 두 차례나 게재를 거부당했던 ‘“김일성 만세”’는 시인의 용감한 사상 고백이나 정치적 선언이 아니다. 시는 누군가의 사상을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상에 대해 각자 어떤 입장을 취하든 그것이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토론될 만한 것이라면 신문, 문학잡지, 국회, 술자리, 파출소 어디에서나 당당하게 언급되고 인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불온사상을 인정하는 순간 창작의 영역을 포함한 모든 언론의 자유가 사라진다고 믿는 이들에 맞서, 그는 그것을 인정할 때에만 진정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단언한다.

물론 그가 사회주의하에서의 문학의 형편을 모를 리 없다. 1960년대에 러시아 시인 조지프 브로드스키는 당과 혁명에 기여하지 않는 쓸모없는 시를 쓰는 “사회의 기생충”으로 낙인찍혀 5년의 강제 노동에 처해졌다. 김수영은 미국 뉴욕 공산당 조직이 발행한 <파르티잔 리뷰>의 애독자였는데, 이 잡지에는 스탈린주의에 실망한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새로운 혁명과 예술의 방향을 모색하며 쓴 글들이 주로 실렸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는 멕시코에 망명해 있으면서 스탈린의 관변 예술과 미국의 자본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는 유명한 글 ‘미술과 정치’를 여기에 게재했다. 예술이 정치든 상업이든 어떤 외부의 간섭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김수영 시 ‘푸른 하늘을’ 육필초고.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우편물 봉투 뒷면에 썼다. 김현경 제공
김수영 시 ‘푸른 하늘을’ 육필초고.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우편물 봉투 뒷면에 썼다. 김현경 제공

이런 세계사적 현실 앞에서는 “김일성 만세”를 비롯해 모든 정치적 내용을 몰아낸 문학의 공간이 보장되어야만 시인이 비로소 자유롭고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혁명에 열렬히 참여했던 예술가들의 비극적 말로를 떠올린다면, 문학의 어항 속에서 자유의 공기를 뻐끔거리는 예쁜 금붕어로 사는 게 뭐 그리 나쁜 일인가. 그러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없다. 역사적 피로감에 전 몸을 누이고 잠들고 싶은 게 당연하다.

그러나 “김일성 만세”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우기는 관리의 말에 시인은 잠이 깬다. 김수영은 술에 취하면 이북 노래를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질겁해서 훈계를 하는 동료의 얼굴을 보며, 그는 이렇게 겁먹은 이를 자유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시민으로는 자유롭지 않으면서 시인으로는 자유로운 상태가 가능한가. 만일 이런 자유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난민의 자유와 유사할 것이다. 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렇게 말한다. 첫째, 난민은 전체주의 조국에서보다 수용소 안에서 철학적·정치적 의견을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들이 뭐라 하든 그 의견은 자신들을 받아준 정치체에 중요하고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수용소 앞마당에서 마음껏 떠든 의견은 무의미한 웅얼거림, 일종의 허튼소리에 불과하다. 둘째, 난민의 자유는 오직 그들이 당도한 국가의 시혜에 따라 결정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선한 주인을 만난 노예들은 가난한 자유인보다 편안하게 살았지만 여전히 노예였다. 그들의 행운과 불운은 모두 주인 마음에 달려 있었다. 결국 자유라는 “인권의 근본적인 박탈은 무엇보다 세상에서 거주할 수 있는 장소, 자신의 견해를 의미 있는 견해로, 행위를 효과적인 행위로 만드는 그런 장소의 박탈로 표현되고 있다. (…) 그들은 자유의 권리가 아니라 행위의 권리를 박탈당했고, 좋아하는 것을 생각할 권리가 아니라 의사를 밝힐 권리를 빼앗겼다.”(<전체주의의 기원>)

&lt;신문예&gt; 1959년 8·9월호에 발표된 시 ‘사령’. 맹문재 제공
<신문예> 1959년 8·9월호에 발표된 시 ‘사령’. 맹문재 제공

그러므로 정치적인 내용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쓸 수 있다고 해서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정치적 금기어들이 시 속에서는 허용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시 속에만 갇혀 있는 말들은 백치의 웅얼거림, 또는 잠꼬대와 다를 바 없다. ‘“김일성 만세”’의 게재를 거절당했을 무렵, 김수영은 만취 상태로 눈 위에 쓰러져 있다 지나가던 학생에게 업혀 파출소로 옮겨진다. 순경을 보자 그는 절을 하며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올시다”라고 주정을 한다. 하지만 아침에 깨서는 간밤의 일에 겁을 집어먹은 자신이, 또 “술을 마시고 ‘언론 자유’를 실천한 나 자신이 한량없이 미”워진다(‘시의 뉴 프런티어’). 시로 쓴 것을 치안의 공간에서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신의 무의식적 발로였겠지만, 그는 결국 시를 술꾼의 허튼소리로 만들었다는 데 자괴감을 느낀다. 처벌이 없었던 것은 시인이 자유로워서가 아니라, 그 순간 순경이 그의 발언을 정치적 금치산자의 말로 취급해 아량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lt;한겨레&gt; 자료사진
한나 아렌트. <한겨레> 자료사진

시혜적인 조건부의 자유 아래 자유롭다고 말하는 자는 노예, 죽은 영혼에 불과하다.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사령’(死靈)). 한국전쟁 당시 김수영은 화장실에서 목 잘린 시체가 떠오르던 포로수용소에 2년간 갇혀 있다 풀려났다. 그러나 쓰려던 사상을 금지당한다면, 시를 통해 말한 것이 공적 공간에서 의미 있는 발화로 인정될 수 없다면, 그것은 그에게 형편 좋은 수용소 안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문학적 자유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 안에 닻을 내릴 수 있을 때에만 온전한 것이다. 자유는 정착을 경계하지만 난파가 아니다. 물 위에 거주하려면 정박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 힘을 위해 그는 역사 속에 시의 거대한 닻을 내리려 했다.

진은영 시인.
진은영 시인.

진은영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 시인

“김일성 만세”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 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 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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