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스튜디오가 판권을 가지고 있는 슈퍼히어로들의 이야기는 점점 하나로 묶여 해가 지날수록 얽힘이 깊어지고 타래는 단단해지고 있다. ‘세계관’이란 단어를 유행시킨 마블 스튜디오의 시도는 말이 안 되는 것을 이어붙여 말이 되는 것처럼 만들다가 생겨났다. 태어난 시대와 장소, 활약했던 사건들이 모두 다른 슈퍼히어로들을 한데 모아 이야기를 만들다 보니 시간도 거스르고 공간도 뛰어넘는다. 우주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로지르며 짜릿한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하지만 황당무계한 구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장치를 꼼꼼히 심어야 한다.
시공간을 가로지르기 위해 다양한 세계를 설정한다. 구체적으로 보면 토르의 세계인 아스가르드를 비롯해서 요툰하임, 지구를 포함하는 여러 세계들이 세계수 위그드라실에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다양한 세계 사이를 오가는 것은 빛의 속도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물리학과 우주론에서 논의되고 있는 다중우주론과 평행세계를 도입한다. 조건에 의해 통상적으로 시간과 공간에서 갈래가 나뉜, 그래서 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여러개의 다중우주가 무한하게 존재한다는 다중우주론. 그중에 하나로 같은 모습을 가지고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수없이 많은 우주가 존재한다는 평행세계에 대한 생각을 적용하면 시공간을 넘어서는 것은 물론이고 인과율도 가볍다.
자연에 존재하는 네 종류의 힘 중에서 중력을 제외한 전자기력, 약력, 핵력을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현대물리학의 표준모형에 대해서 과학자들이 가진 가장 큰 불만은 별다른 개연성 없이 임의의 상수가 19개나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중력까지 포함해서 모든 힘이 통합되어 있던, 완벽한 대칭성을 가지고 있던 대통일의 상태가 있었고 대칭이 깨지고 힘들도 나뉘었을 때, 19개 상수의 값이 서로 다른 여러 우주가 생길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이론적인 이야기가 서로 다른 히어로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여느 사람들처럼 좋아하고 갈등하고, 세계가 가진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적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제법 그럴듯하지 않은가?
다른 우주에서 온 무기들이 몰매를 때려도 멀쩡한 헐크, 망치로 괴수들을 박살 내는 토르, 현대기술의 정화인 슈트를 입은 아이언맨에 비하면 뒤처지는 무력을 지닌 블랙 위도우의 능력은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그녀의 능력은 레드룸이라는 스파이 양성 기관에서 받은 신체개조와 학대라고밖에 볼 수 없는 훈련 덕에 얻은 것이다. 이 스파이 양성 기관은 나이가 어린 여자아이들을 훈련시켜 세계 각지에 침투시키고 테러를 일삼는 조직. 마블 스튜디오에 의해 이미 다른 슈퍼히어로들과 힘을 합해 싸우고 있는 블랙 위도우는 그들을 잊고 살았지만, 계속 납치와 학대, 그리고 새로운 공작을 하던 레드룸을 발견하고 소탕한다.
혹여 바이러스라도 옮을까, 옮길까, 마음 졸이며 영화로 본 <블랙 위도우>를 다시 만화로 찾아 읽었다. 영화를 보면 압도적인 속도에 실려갈 수밖에 없는데 책은 내 속도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영화와 만화가 다른 우주에서 전개된다는 사실. 만화 속의 블랙 위도우는 동생도 없고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가 미세하게 어긋난다. 논리적인 연결에는 실패하지만 그 틈새에서 느끼는 재미가 크다. 같은 내용이 변주되어 미디어를 넘어가면서 서로 다른 우주를 구축한다. 그래서 책과 영화는 함께 즐기면 더 신난다.
만화애호가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