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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짙은 자기 환멸을 내쉴지언정 내 조국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등록 2021-09-06 04:59수정 2021-09-06 09:31

[거대한 100년 김수영] (16) 적

“하… 그림자가 없다”
일제가 가렸던 이 땅에
조국의 진보를 가로막는
자신이 속한 삶의 곳곳
‘무수한 반동’들 앞에서

시인으로서의 그는
그토록 비루한 일상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김수영 시 ‘적 2’ 육필초고 앞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시인 김수영이 살고 또한 죽었던 한국. 수십년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후 다시금 수년간 전쟁의 포화에 숱한 사람이 죽었고, 타락한 정권을 민중의 손으로 교체했고, 곧이어 일군의 군인들이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나라. 절대 빈곤에서의 탈출과 민주주의와 근대화를 향한 염원이 동시에 들끓던 시절, 김수영은 ‘적’에 대한 상상과 사유에 골몰했다. 그 적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그가 그토록 바라는 나라와 세상은 도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김수영의 ‘적’에 대한 글은 너무나 많아서 뭘 더 보태야 할지 난감하기도 하다. 그런데 우연찮게 직장동료인 이윤영 교수로부터 아이디어를 구하게 됐다. 같이 점심을 먹는데 그가 말했다. “임화의 ‘적’이라는 시를 아시나요? 아마도 김수영은 분명 그 시를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일부를 옮기면 아래와 같다.

“(전략)// 적이 나를 죽도록 미워했을 때,/ 나는 적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미움을 배웠다./ 적이 내 벗을 죽음으로써 괴롭혔을 때,/ 나는 우정을 적에 대한 잔인으로 고치었다./ 적이 드디어 내 벗의 한 사람을 죽였을 때,/ 나는 복수의 비싼 진리를 배웠다./ 적이 우리들의 모두를 노리었을 때,/ 나는 곧 섬멸의 수학을 배웠다.// 적이여! 너는 내 최대의 교사,/ 사랑스런 것! 너의 이름은 나의 적이다.//(하략)”

김수영 시 ‘적 2’ 육필초고 뒷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임화의 적이 무엇일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조선의 자주적 진보를 가로막는 것들, 낡은 질서와 제국주의였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의 지식인과 민중은 얼마나 노력해야 했던가? 적의 정체는 분명해 보였고 이 적과의 싸움을 통해 임화는 학습하고 성장하는 주체가 되려 했다. 그리고 그러한 주체화가 자신에 국한되지 않기를, 모든 조선인이 깨우침을 얻고 독립을 쟁취하기를 임화는 간절히 소망했을 것이다.

임화는 <조선신문학사>에서 근대문학을 진보한 정신의 표현으로 보았다. 그에게 근대문학은 풍속도 풍자도 아니요, 정신적인 투쟁이자 성취였다. 또한 서구의 계몽정신과 조선의 유구한 전통과 당대적 투쟁의 교섭 속에서 새로운 문학과 문화가 구현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임화를 비롯한 1930년대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의 문학과 현실을 얼마나 깊이 고심했을까? 그들은 정신적 식민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숱한 밤을 새우며 토론을 하고 글을 쓰고 문학 작품을 창작했을 것이다.

임화. &lt;한겨레&gt; 자료 사진
임화. <한겨레> 자료 사진

1930년대는 독서의 시대였다. 소위 세계문학전집과 조선문학전집이 대량생산되던 시기였다. 1960년대 또한 문학전집의 시대였다. 지식인과 민중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서구의 지식과 예술과 문학을 흡수하고 또 흡수하였다. 독서 속에서 그들은 ‘적’과 ‘유토피아’의 형상을 발견했다. 나는 아버지 서재에 있던 문학전집을 기억한다. 아버지를 매혹한 사상은 실존주의였다. 아버지 세대에 지적 취향을 가진 많은 이들에게 실존주의는 종교에 가까웠다.

실존주의는 4·19 혁명뿐만 아니라 5·16 쿠데타까지 옹호했다. 내가 접했던 흥미로운 자료 중 하나는 5·16 쿠데타를 사르트르의 ‘앙가주망’ 개념으로 이해한 한 젊은 장교의 글이었다. 그는 진지했고 지적이었고 5·16 쿠데타가 정당하다고 믿었다. 그 시절, 진보와 보수는 모두 낡은 것을 혐오했고 혁명을 바랐다. 전후의 한국을 이해하고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할 때 그 사상적 기준은 서구의 철학과 지식이 정립해주었다.

김수영 시 ‘적 1’ 육필초고. <엔카운터> 잡지 봉투 뒷면에 쓴 것으로,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시인 김수영에게 당대 대한민국의 적은 임화의 조선의 적보다 더욱 더 전면적으로, 더욱 더 절망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것은 미완의 혁명과 불법적 쿠데타만은 아니었다. 일제가 사라진 이 땅에는 또 다른 후진성이 계속해서 정신의 발목을 잡고 조국의 진보를 지체시키고 있었다. 임화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것, 일제라는 너무나 거대한 그림자가 가렸던 적, 바로 평범한 일상과 사람이었다. 김수영은 ‘하… 그림자가 없다’라는 시에서 말한다.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하… 그림자가 없다”

아마도 김수영이 시를 쓰지 않는 보통의 지식인이었다면 민주주의와 혁명과 독재와 통일에 대해서, 거대한 이야기에 대해서만 말했을 것이다. 1960년대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가장 큰 화두는 민족문화였다. 그들 중 일부는 협회를 만들고 단체를 만들어 정부에 “민족문화의 중흥”을 요구했고 정부의 문화정책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들은 서구 사상과 예술의 세례를 받아 식민 잔재와 외부의 적과 싸움을 벌이며, 전통문화와 서구 예술을 조화시켜 문화국가를 건설하려는 거대한 기획에 참여하였다.

그 누구보다도 서양 사상과 문학에 매료되었던 김수영이라고 그 거대한 기획에 관심이 없었겠는가? 김수영 또한 조국의 후진성이 지긋지긋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일상이란, 그 그림자 없는 적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내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자신의 실존 전체가 속한 삶의 익숙한 흐름과 공동체를 어찌 그리 간단히 거부할 수 있는가? 스스로를 견딜 수 없는 것만큼 견딜 수 없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김수영은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같은 “무수한 반동”(‘거대한 뿌리’)들에 굴복하고 그것들에 대한 애정을 고백한다. 어쩌면 진보와 혁명은, 만약 그것이 시작한다면, 그처럼 비루한 일상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자리에서 시작해야 한다.

김수영 시 ‘적 1’과 ‘적 2’의 <한국문학> 1966년 봄호 발표본. 맹문재 제공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지식인으로서의 김수영과 시인으로서의 김수영을 구별해본다. 지식인들은 늘 ‘적’을 분별하고, 그 적과 도덕적이고 지적인 싸움을 벌이며 자신의 정당함을 선포하는 집단이다. 김수영 또한 그러했다. 그는 ‘적’ 없이는 사유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김수영은, 생활의 세계를 살고 부여잡고 해찰했던 그는 끝까지 환멸할 수 없는 자였다. 환멸하는 자신을 환멸할지언정, 허접한 세상살이와 사람살이, 그가 그토록 흠모하는 모던한 세계의 반대인 대한민국을 환멸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시를 읽을 때, 내게 더욱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그가 대한민국의 후진성을 발견하고 또 사랑하도록 도움을 준 텍스트가 바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책,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었다는 점이다. 어떻게 서양 이방인의 시선을 취할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된단 말인가? 자기 오리엔탈리즘을 어떻게 이리도 뻔뻔하게 드러낸단 말인가? 산문과 논문이었으면, ‘참고문헌’으로 쿨하게 책과 저자를 인용했겠지만 김수영은 시에서 “나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고 참으로 쿨하지 않게 고백한다.

세상을 ‘적과의 싸움’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 그 관점이 하도 집요해서 자신의 일상과 이웃에서 적을 발견하는 이, 하지만 그 적을 끝까지 미워할 수 없는 이, 그런데 그 관점이라는 것이 결국엔 생활이 아닌 서양 물이 든 책과 이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자기 나라의 ‘거대한 뿌리’를 남의 나라의 ‘종이 나부랭이’로 사유하며 (자기)연민과 (자기)환멸에 젖는 이, 그가 김수영이다.

장담컨대 그런 종류의 “위대하게 찌질한” 시인은 다시는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어느 나라의 어떤 시인도 “VOGUE야 넌 잡지가 아냐/ 섹스도 아냐 유물론도 아냐 선망조차도/ 아냐―선망이란 어지간히 따라갈 가망성이 있는/ 상대자에 대한 시기심이 아니냐”(‘VOGUE야’)라는 시를 간단히 “K-pop아, 넌 노래가 아냐”라고 바꿔 쓸 수 없다. 모국어로 문학을 하고, 그 나라에서 오래 기억되고 숭앙받는 지식인―시인의 형상은 영영 사라졌다.

내 상상 속에서 김수영은 임화의 ‘적’을 읽고 이렇게 말한다. “임화의 적은 임화의 적일 뿐이다.” 나는 김수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김수영의 적은 김수영의 적일 뿐이다.”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그는 유일무이한 시인이다. 내가 김수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적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없다.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늠름하건 늠름하지 않건, 적을 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라고 말하라고 나의 적은 나의 귀에 속삭인다).
심보선 시인.
심보선 시인.

심보선 시인·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하… 그림자가 없다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커크 더글러스나 리처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요릿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동정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 전선은 됭케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초토작전이나
<건 힐의 혈투> 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환담을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토목 공사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시장에 가서 비린 생선 냄새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수업을 할 때도 퇴근시에도
사이렌 소리에 시계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 그림자가 없다
하… 그렇다…
하… 그렇지…
아암 그렇구말구… 그렇지 그래…
응응… 응… 뭐?
아 그래… 그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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