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이름 뒤에 ‘시인’이라는 호칭이 붙은 바 있는 나의 첫 책은 시집이다. 1991년, 등단한 지 5년 만에 데뷔작 포함 오십여 편의 시를 담은 시집이 나왔는데 당시 다니던 직장에 배달된 조간신문에 자그맣게 기사가 나는 바람에 회사에도 내가 낸 시집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우표만 한 사진까지 박혀 있었던 터라 전국에 스무 명쯤으로 추정되는 동명이인들에게 ‘영예’를 미룰 수도 없게 되었다. 어쨌든 직장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시집을 다 냈느냐’고 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쑥스럽고 부끄러웠다. 시집은 다른 책과 좀 다르게 그 시집을 낸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묘약이라도 들어 있는 모양이다.
이름 앞, 혹은 뒤에 소설가라는 호칭이 붙는 요즘의 나의 ‘첫 소설책’은 1994년, 직장인의 ‘직’에서 ‘자원 해제’되고 나서 한 해 뒤 겨울에 나온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라고 할 수 있겠다. 첫 소설책이면 됐지, ‘할 수 있겠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게 무슨 의도에서 나온 것이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없어 마땅하다), 이건 그저 속 편하게 원고량을 늘려보려는 ‘수작’만은 아닌 것이 그 책 속에 들어 있는 38편의 산문이 시인지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1994년 여름의 역사적 더위가 낳은 ‘자동기술’의 결과물인지, 아무것도 아닌 것 혹은 아직 명명되지 않은 장르의 융복합체인지 나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는 ‘성아무개 소설’이라는 표지의 표기 때문에, 덕분에 소설 코너에 가서 꽂혔고 소설이라고 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수월하게 재판을 찍었다. 그 책을 소설책으로 읽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시인’인데도 소설 청탁을 받았고 청탁을 받았으니 썼고 ‘아무개가 시를 쓰다 잘 안 되니까 소설을 쓰는구나’ 하는 말을 먼 뒷날 듣기도 했으나 조금도 상처를 받지 않았다.
소설가 성석제.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어쨌든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에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용감한 작품’이 몇 들어 있다. 그 용감성의 기원을 말하자면 그 책에 든 대부분의 원고가(두 편을 서울시에서 반상회 때 무료 배포하는 주간신문에 합당한 원고료를 받고 실었다) ‘전작’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곧 길게 쓰나 짧게 쓰나 잘 쓰나 못 쓰나 원고료가 없으니(인세는 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중 특별히 용감한 작품은 워낙 짧기 때문에 이 지면에 소개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의 차례를 보니 그 ‘꼭지’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허, 이 무슨 변괴인고? 그러니까 그건 책의 차례에도 들지 못한 그런 ‘무엇’이다. 그게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내가 그랬는지 편집자가 그랬는지도. 상관은 없다.
소설가 성석제.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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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한 문단이 글의 제목이다. 제목이 너무 길어서 시선을 돌리고 싶어질 독자를 붙들기 위해 본문은 최대한 간단하게 작성했다. 가운데점[·]이 수백 개 찍히고(그건 해당 페이지에 ‘이딴 게 뭐야?’ 같은 낙서를 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쓴 것일 뿐 문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난 다음의 본문은 아래와 같다.
‘응.’
이 한 편의 글을 책의 마지막에 추가하면서 내 딴에는 살짝 즐거웠던 것 같다. 이전에 썼거나 읽었던 어떤 것과도 다른, 새로움의 힘을 느꼈다고나 할까. 그 즐거움을 지구상에 있었거나 있을 누군가, 언젠가 단 한 사람쯤은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소설가 성석제
중단편소설이 담겨 있는 첫 창작집이다. 처음 나올 때의 제목은 <새가 되었네>였다. 두번째로 나올 때의 제목은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였고 마지막으로 나온 개정판의 제목이 <첫사랑>이다. 이 책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인 20여년 전에 비해 지금의 나는 모르는 게 더 많아진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절로 현명해진다고 어릴 적에 들은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왜 그렇지 않은지 그 이유도 잘 모르겠다. l 문학동네(2016)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리던 때 출간된 창작집이다. 월드컵 열기 때문에 사람들이 별 관심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꼭 축구만 보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월드컵이 지나고 나서 무슨 일로 사람들이 수십 명 모인 자리에 갔더니 누군가 좀 떨어진 곳에서 내게 “만근아, 황만근!”이라고 불러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며 “네!” 하고 대답한 기억이 난다. l 창비(2002)
음식에 관련된 에세이나 짧은 소설을 모아서 낸 책(2~3권? 가운데 하나)이다. 제목 때문인지 내용 때문인지 조리서 코너에 가지 못했는데 조리사협회인가 하는 곳에서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 뭔가 새로운 관점에서 음식을 바라보는 사람의 이야기가 필요했던 모양인데 나는 그들의 기대에 그다지 부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내가 한 수 배워 가지고 와서 여러 곳에 잘 써먹었다. l 문학동네(2011)
가장 고통스럽게 탈고를 한 소설이다. 우연이 겹치기도 하고 시절이 그러하기도 했고 과장되게 말하면 살을 베고 뼈를 깎는 듯한 느낌이 따르는 때도 있었다. 원래 문학이라는 게 그러한 것인데, 내가 잘 몰랐기에 겪게 된 당연한 업보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오랜만에 나 아닌 어떤 사람들 앞에, 존재와 기억, 공동체의 기록 앞에 나는 겸손하고 진지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그 순간이 참으로 좋았다. l 창비(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