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커상 최종후보 정보라 작가
‘죽은 팔’로 활동…2008년 첫장편
‘호’ 문학상 폐지되며 올해 출간
“쓸 때마다 막막…발전일 것”
‘죽은 팔’로 활동…2008년 첫장편
‘호’ 문학상 폐지되며 올해 출간
“쓸 때마다 막막…발전일 것”
나의 첫 책 │ 소설가 정보라
나의 ‘첫 책’은 최소한 세 개다. 처음으로 책에 실린 소설은 단편 ‘죽은 팔’이다. 2000년쯤에 쓴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아랫집이 공사를 해서 두드리는 소리가 하루종일 들리는 게 너무 시끄럽고 괴로웠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지인이 취직을 하고 독립을 하게 되어 같이 집을 보러 다녔는데 그 경험도 집어넣었다. 다 쓰고 보니까 혼자 묵혀두기는 좀 아쉬워서 환상문학웹진 ‘거울’에 투고했는데 당시 편집장이었던 박애진 작가님이 연락을 해서 나는 덜컥 필진이 되었다. 필진으로서 게재한 첫 작품이 ‘죽은 팔’이었고, 웹진 거울에서 이 작품을 본 ‘판타스틱’ 편집자님이 연락해서 종이잡지에도 게재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작가’로서 어딘가에 이름과 작품을 내는 경험을 처음 하게 된 것은 ‘죽은 팔’ 덕분이다. 다만 판타스틱은 2008년 당시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환상문학 전문 종이잡지였는데 아쉽게도 이후 곧 폐간되었다.
2008년에 구미호 전설을 소재로 한 장편 ‘호’도 썼다. 한국의 설화나 전설을 소재로 낭만적인 이야기를 써서 해피엔딩을 만들고 싶었는데 얼른 떠오르는 것이 ‘전설의 고향’과 구미호였다.
‘전설의 고향’은 언제나 외할머니와 함께 보았던 어린 시절 최고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었다. 2008년에 외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병원에 가려면 지하철로 편도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중환자실은 하루에 두 번, 30분씩만 면회가 가능했기 때문에 나는 지하철을 타고 두 시간 가면서 할머니에 대해서 생각하고, 두 시간 걸려서 집에 돌아오면서 울었다. 그 오고 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싸우는 이야기를 간절하게 상상했다. 소설을 생각하면서 현실도피를 하고 조금은 스스로 위로했던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조각조각 궁리하던 이야기들은 나중에 장례를 치르고 나서 단숨에 완성했고 이 작품으로 디지털문학상 모바일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그때 수상하면 전자책으로 출간해주는 것이 공모 조건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디지털문학상 자체가 없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사이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강사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바빠서… 잊어버렸다!
‘호’는 나의 첫 장편이다. 문학상에 응모해서 수상했으니 정보라가 장편도 쓸 수 있다는 외부의 객관적인 인정을 받은 첫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책이 출간된 건 2023년이니 ‘오래된 첫 책’이라는 오묘한 위치에 머무르게 되었다. 강산이 1.5번 바뀌는 세월이니 그 사이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새로 출간하면서 스마트폰이나 거리 풍경 같은 부분들을 조금 업데이트했다. 그러나 할머니를 살리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애초의 소망은 변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보고 싶다.
‘호’가 저장장치 속에 잠들어 있는 동안 내 이름을 달고 처음 출간된 단행본은 2010년에 나온 ‘문이 열렸다’(파란미디어)였다. 지금은 절판되었는데, 어떤 조건에서 늑대인간으로 변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떤 조건이 맞아 떨어지면 달걀귀신이 돼 버리는 사람이 연애하는 이야기이다. ‘호’도 초자연적인 존재와 연애하는 이야기인데, 아무래도 이 시기에 나는 무척 연애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가 번역한 책은 창작보다 훨씬 먼저 나왔다. 폴란드 작가 브루노 슐츠(1892~1942) 작품집 ‘계피색 가게들’(1934)과 ‘모래시계 요양원’(1937)이 2003년 출간되었다. 이 두 작품집은 하나로 묶여 ‘브루노 슐츠 작품집’이라는 단순한 제목으로 2013년 을유문화사에서 재출간되었다. 슐츠의 만연체가 무척 어려웠지만, 폴란드에서 어학연수하던 때에 원어의 묘미를 생생하게 느끼면서 번역했다. 그리고 슐츠의 꿈결 같은 문체와 풍성한 묘사, 엉뚱한 전개와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에 나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에게는 슐츠 작품집이 내 창작 첫 책보다 먼저 세상에 나왔고 나중에 나에게 창작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 진짜 첫 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첫 창작은 지금 보면 아무래도 미숙한 부분들이 있겠지만 신선한 발상만큼은 지금보다 그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도 한다. 어쨌든 나는 매번 쓸 때마다 처음 소설 쓰는 것 같은 막막함을 마주한다. 나 자신이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어쨌든 발전하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랬으면 좋겠다.
정보라 소설가
■그리고 다음 책들
죽은 자의 꿈
‘문이 열렸다’에 이어 또 초자연적인 존재를 등장시켜 연애하는 이야기를 구상했다. 이번에는 추리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호러의 요소가 더 많은 것 같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실제로 일어났던 성범죄 사건에서 착안했다. 불행히도 그 이후로도 대학 내 성범죄 사건은 끊이지 않고 일어나며 학교는 여전히 가해자를 옹호하는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그래도 누군가는 기억하고 누군가는 오랫동안 분노한다는 사실을 글로 남겨놓고 싶었다.
파란미디어(2012)
저주토끼
트위터에서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몰랐던 어떤 트친님이 나한테 ‘취향에 잘 맞을 것 같다’며 이 책을 권해 주신 것을 지금까지도 작가인생 최고의 칭찬으로 기억한다. 2018년 서울 홍대입구 인근에서 열린 와우북 페스티벌에서 출판사 부스에 들른 난데없는 고객님의 번역출간 제의를 받았다. 별생각 없이 동의했다. 이 난데없는 고객님은 불세출의 실력자인 안톤 허 번역가였다. ‘저주토끼’는 2021년 영국 혼포드 스타에서 출간되었고 2022년 부커상 국제부문 최종후보에 올랐다. 정말 난데없는 일이다.
래빗홀(2017, 2023)
아무도 모를 것이다
오래된 단편들을 모아서 새로 발간하면서 쑥스럽기도 했고 새삼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원고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언제나 일관되게 초현실적인 소재와 복수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Nessun sapra’는 대학원 다닐 때 매료되어 지금까지 좋아하는 러시아 작가 두 명의 비극적인 삶을 적당히 섞어서 지어냈는데 쓰다 보니까 처음 구상할 때보다 훨씬 더 기괴한 이야기가 되어 매우 만족하고 있다.
퍼플레인(2023)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있었다
실제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타데우슈 보로프스키(1922~1951)가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쓴 단편을 모았다. 악한 나치 대 선한 죄수의 단순한 구도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죄수들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생존자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폴란드에서도 출간 당시에 크게 논란이 되었다. 내가 번역한 책 중에서 가장 괴로운 작업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이렇게 괴로운 작품은 다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번역하고 싶었다.
파란미디어(2011)
러시아문학 전공자로 번역을 먼저 해온 작가 정보라(47)는 “쓸 때마다 처음 소설 쓰는 것 같은 막막함을 마주한다.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어쨌든 발전하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진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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