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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구차하기에 더욱 말해야 하는 돈, ‘적’과의 동침을 택했다

등록 2021-09-27 04:59수정 2021-09-27 08:23

[거대한 100년, 김수영] (18) 돈
김수영 시 ‘돈’ 초고.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김수영 시 ‘돈’ 초고.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현경 제공

김수영을 떠올리게 하는 많은 키워드들이 있다. 어떤 단어들은 김수영을 키워드로 가진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얻은 이 글의 지면이 기획되었고 이렇게 줄기차게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김수영은 또한 ‘돈’이라는 제목의 시를 쓴 시인이다. 다시 말해, 김수영을 읽는 키워드 중의 하나가 ‘돈’이다. 은유도 상징도 아닌 직설로 그는 돈을 말하고 사유했다. 어느 연구자가 헤아려본 바에 의하면, 김수영이 남긴 시 178편 중에서 돈 얘기가 나오는 시는 36편, 이는 얼추 전체 시의 20%에 해당하는 편수다.

그는 무엇 하러 시에다 돈 얘기를 구차하게 해댔던 걸까. 이렇게 묻는다면, 그는 너의 질문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보라고 말할 것 같다. 돈에 얽힌 사건과 관계와 마음이 구질구질해서, 구질구질함을 의식하는 것이 불편해서, 그는 자기기만과 아이러니를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구차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차하기에 쪽팔리게 말해야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김수영이 가진 시적 태도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김수영을 읽는 일은 돈 얘기를 구질구질하다고 여기 이렇게 쓰고 있는 나의 허위의식이 정확히 발각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영의 시는 불편한 실재의 거울이 되어 나를 건너다본다. 그 시선을 김수영식으로 말하면, 바로 보기, “정시”(正視)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김수영의 시는 비루하고 창피해서, 무섭고 겁이 나서, 제대로 보지 못하던 것들을 바로 보는 정시(正視)의 경험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김수영은 김수영을 바로 보고자 했는데, 김수영의 거울에서 우리는 저마다 자기 그림자를 본다. 김수영의 시 ‘돈’의 마지막 문장을 읽어보자. “아무도 정시(正視)하지 못한 돈―돈의 비밀이 여기 있다”.

<시녀 이야기> <눈먼 암살자> 등의 소설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 중에는 <돈을 다시 생각한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산문집이 있다. 김수영의 시편들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돈을 빌리고 갚는 일에 대해 애트우드는 세계고전문학을 통해서 다시 사유하고자 했다. “작가는 자신을 신경 쓰이게 하는 것에 대해 쓴다.” “작가는 또한 자신을 혼동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쓴다.” 이것은 애트우드가 이 책의 주제를 꺼내 놓으면서 상기시킨 두 개의 문장이다. 말하자면, 돈은 “나를 가장 신경 쓰이게 하고 혼동시키는 것 중 하나”라는 것이다. 김수영이 바로 그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김수영은 김수영의 방식으로 돈을 다시 생각하고 다시 써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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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계> 창간호(1964년 8월호)에 발표된 김수영 시 ‘돈’. 맹문재 제공

시를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쓰고자 했기에 냉전과 독재가 만들어낸 정치적인 금기어가 불편하고 신경 쓰였고, 그래서 금기의 38선을 넘으려고 김수영은 꿈속에서도 땀을 흘렸다. 시에서 돈을 직설로 말하는 문제 또한 다른 맥락에서 시적 금기를 찢는 일, 시와 산문의 경계를 해체하는 일이기도 했다. 돈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상정된 시의 영역에서는 돈의 문제에 관한 한 초월하거나 초연하거나 덮어놓는 제스처가 무의식적인 관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례에는 전통적인 유교 의식이나 교양도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자신을 신경 쓰이게 하는 것, 자신을 혼동시키는 것, 김수영 식으로 말하면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좀처럼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문제(산문 ‘마리서사’), 그는 작가로서의 자신에게는 그런 문제가 세 가지 있다고 말한다. 그가 밝힌 세 가지 문제는 “죽음과 가난과 매명(賣名)”이다. 적어도 가난의 문제와 매문(賣文), 매명(賣名)의 문제는 직접적으로 ‘돈’과 연관된다. 가난을 숨길 수 없는 거리의 아이들을 보며 “왜 저 애들은 내 자식만큼도 행복하지 못한가 하는 막다른 수치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고 토로하는 김수영에게 가난은 이 세상, 이 나라의 문제이며 자본주의의 문제이며 인간의 문제다. 가난은 늘 그를 위협하고, 주위를 둘러보면 가난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하면 아차 하는 순간에 가난의 구덩이 속으로 굴러떨어질 것만 같다. 그러므로 매문과 매명의 비굴과 허위의식으로부터 그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시적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 그 하나가 정치적인 구속이라면 다른 하나는 돈(자본)의 속박이라 할 수 있다. 김수영은 가차없이 이렇게 쓰고 있다. “지난 1년 동안에만 하더라도 나의 산문 행위는 모두가 원고료를 벌기 위한 매문·매명 행위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다. 진정한 ‘나’의 생활로부터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나의 머리는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받을 원고료의 금액에서 헤어날 사이가 없다.”

백년 전에 버지니아 울프는 “영국의 가난한 집 아이들은 위대한 작품들을 산출하는 지적 자유로 해방될 희망이 아테네 노예의 아들만큼이나 없”다고 말했다(<자기만의 방>). 울프는 물질적인 토대를 가지기 거의 불가능했던 여성의 조건을 들여다보면서, 지적 자유가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울프의 통찰에 따르면, 셰익스피어의 누이가 시인이 될 수 있으려면,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필요로 한다. 울프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로 여겨진 것은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다. 그 내면에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지녔으나 역사적으로 경제적 활동을 통해 돈을 벌 수 없었던 여성들은 글쓰기에서 철저하게 배척되어 왔으며, 버지니아 울프가 문제시하고자 한 것은 바로 그 경제적 불능 상태에 여전히 여성들이 제도적으로 붙잡혀 있다는 점이었다.

버지니아 울프. 위키미디어 코먼스
버지니아 울프. 위키미디어 코먼스

김수영은 울프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소유하기 위한 경제적 활동이 독려되는 1960년대 서울의 남자 시민이었다. 그가 문제적으로 생각하여 정시(正視)의 시선을 겨눈 것은,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지기 위해 노동을 팔아 돈을 버는 경제적 활동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특히 글을 써서 먹고사는 일이라는 것이, 영혼의 자유를 누리고 표현의 용기를 실현하는 일이 되기는 어렵고, 일상적인 노동에 매몰되고 상품으로서의 가치에 구속되기는 쉽다. 김수영은 적과의 동침과도 같은 글쓰기를 계속 의심하고 계속 감시하며 계속 아이러니 속으로 깊이 들어가 분석하고 해부하고 더 정직해지고자 한다.

아도르노는 예술의 현대성을 모든 것을 화폐의 가치(상품가치)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의 동일화로부터 탈주하여 이 세계의 ‘타자’가 되고자 하는 미학적 시도들에서 구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와 존재 자체로서 대립하는 부정성이 미적 현대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수영은 일상을 영위하는 세속에서 예술적으로 탈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적과의 동거를 택했다.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들과 함께/ 적들의 적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아픈 몸이’) 살아가며 시를 쓰겠다고 한다. 언제나 아이러니 속에서 그의 시는 태어나고 아이러니를 껴안고 사랑하며 괴로워하며 눈을 뜬다. 이 아이러니에 대한 태도야말로 김수영의 현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성의 경험을 패러독스와 모순의 삶에서 찾았던 마셜 버먼이 김수영을 읽었더라면. 그의 저서 <현대성의 경험>에는 도스토옙스키, 보들레르, 제임스 조이스, 앨런 긴즈버그, 제인 제이컵스 등과 더불어 김수영의 텍스트가 ‘현대적인 아이러니’ 속에서 투쟁하고 투쟁하며 “모더니즘이 어떻게 리얼리즘에 해당하는지를 제시”한 훌륭한 사례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마침내 인용하는 다음의 시들처럼 말이다.

김행숙 시인.
김행숙 시인.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31일까지 준다고 한 3만 원// (…) 이것을 받아야 할 사람은 1·4후퇴 때 나온/ 친구의 부인/ (…) 31일 오오 나의 판문점이여/ 벌판이여 암흑의 바보의/ 장막이여”(‘판문점의 감상’)

김행숙 시인·강남대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나에게 30원이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 대견하다
나도 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 대견하다
무수한 돈을 만졌지만 결국은 헛만진 것
쓸 필요도 없이 한 삼사 일을 나하고 침식을 같이한 돈
―어린놈을 아귀라고 하지
그 아귀란 놈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집어 갈 돈
풀방구리를 드나드는 쥐의 돈
그러나 내 돈이 아닌 돈
하여간 바쁨과 한가와 실의와 초조를 나하고 같이한 돈
바쁜 돈―
아무도 정시(正視)하지 못한 돈―돈의 비밀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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