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1966년 여름호에 발표된 김수영 시 ‘이 한국문학사’. 맹문재 제공
김수영은 ‘영어’ 실력이 뛰어났다. 고등학교 때 이미 오스카 와일드를 원서로 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낡은 외투 주머니에 항상 <애틀랜틱>이나 <포이트리> 같은 외국 잡지를 꽂고 다녔다는 증언도 있다. “미국문화원에 들러 신간 잡지를 입수해 보는 것은 그의 주요한 과제다”라는 김규동 시인의 증언, 그리고 “은행 뒷담이나 은행 길모퉁이에 벌려 놓은 노점 서적상을 배회하여 다니면서 돈이 될 만한 재료가 있는 잡지를 골라 다니는 것은 고달픈 일이 아닐 수 없”(‘일기’, 1954. 12. 30.)었다는 시인 자신의 고백, 이런 것들이 모여 ‘번역’에 대한 하나의 신화를 만들었다. 김수영의 ‘영어’ 실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연구는 없지만, 포로수용소에서 야전병원의 통역관 일을 했었고, 박태진 시인의 도움을 받아 미8군 수송관의 통역관과 선린상업학교의 영어 교사로 재직했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하면 ‘영어’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던 듯하다.
김수영에게 ‘번역’은 생계 수단이었다. 그의 시와 산문에는 “한 장에 30원씩 받고 하는 청부 번역”(‘번역자의 고독’), “덤핑 출판사의 20원짜리나 20원 이하의 고료를 받고 일하는/ 14원이나 13원이나 12원짜리 번역일을 하는/ 불쌍한 나나 내 부근의 친구들”(‘이 한국문학사’) 등처럼 ‘번역’의 고달픔을 토로하는 대목이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김수영에게 번역은 언제나 생계 이상의 의미였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 즉 1950~60년대를 문화적 후진성이 지배하는 세계로 인식했다. 그런 그에게 ‘번역’은 그 후진성을 견딜 수 있는 힘의 원천이었고, 때로는 그 속악한 세계 ‘너머’를 상상하도록 만든 자극이었다. 김수영은 1966년 2월에 쓴 ‘시작(詩作) 노트’에서 “내 시의 비밀은 내 번역을 보면 안다”라고 밝혔다. 여기서 말하는 ‘비밀’이란 베끼기, 즉 표절 같은 것이 아니라 시의 변화를 이끈 자극들을 가리킨다.
김수영이 이상옥과 함께 번역한 앨런 테이트의 <현대문학의 영역> 표지. 맹문재 제공
김수영의 초기 번역은 잡지 <문학예술>, ‘중앙문화사’, 그리고 번역문학자 원응서와의 관계 속에서 행해졌다. <문학예술>은 1954년 오영진을 주간으로 하여 원응서, 박남수 등의 월남 문인이 중심이 되어 창간한 월간문예지이다. 일본 릿쿄대학 영미학부를 졸업한 원응서는 이 잡지가 외국문학을 번역·소개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출판사 ‘중앙문화사’를 설립·운영하면서 외국문학과 사회과학 등의 번역·출판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1960년대까지는 한국 사회의 기본적인 방향과 성격이 형성되던 시기였는데, 이 시기 <문학예술>과 ‘중앙문화사’의 운영 주체들은 아메리카니즘, 즉 ‘미국’을 한국이 나아가야 할 유일한 모델로 인식했다. 실제로 <문학예술> 자체가 미국공보원과 아시아재단의 재정 보조를 받아서 운영된 것이기도 했다. 원응서는 1966년에 출간된 <해방문학 20년>(한국문인협회 편)에서 <문학예술>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외국문학 편집을 위해 다달이 구입한 문학지, 혹은 종합지로서는 영어로 된 것은 <아틀랜틱>, <파티즌·리뷰>, <런든·매거진>, <인카운터>이고, 프랑스어로는 <프레브>, 때로는 독일어의 <모나트>지를 구입했다. (중략) 여기에 손을 도와준 분으로는 박태진, 김수영, 곽소진, 김용권 제씨와 <뉴·디렉션>의 장서를 빌려준 맥타가트 씨 외에도 많은 분이 도움을 주었다.” 김수영은 ‘중앙문화사’에서 무려 여섯 권의 단행본을 번역·출간했다. R. W. 에머슨의 <문화, 정치, 예술>(1956), 브라운 편의 <20세기 문학평론>(1961), 앨런 테이트의 <현대문학의 영역>(1962), 벌 아이브스의 <아리온데의 사랑>(1958), 수잔 라뱅의 <황하는 흐른다>(1963), 애나 P. 로즈의 <나의 사랑 안드리스>(1958)가 그것들이다. 당시 ‘중앙문화사’는 미국의 사회과학과 문화, 그리고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책들을 주로 번역·출판했다. 그것들은 미문화원의 전신인 미국공보원에 재직하고 있던 아서 J. 맥타가트를 통해서 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수영이 공역한 <20세기 문학평론> 표지. 고봉준 제공
정종현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김수영은 제1회 시인협회작품상의 부상으로 <엔카운터>와 <파르티잔 리뷰>의 정기구독권을 받았고, 구독기간을 연장하여 죽을 때까지 구독했다. 하지만 1957년 이전에도 그는 <문학예술>을 통해 두 잡지만이 아니라 <런던 매거진>, <애틀랜틱> 등을 읽었다. 그런데 김수영은 번역을 ‘부업’(‘번역자의 고독’) 삼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번역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김수영은 번역 텍스트와의 대화적 관계를 통해 자신의 문학론을 구축해갔다. 냉전의 주체들은 미국의 문학, 문화, 사회과학 등을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한국이 미국을 닮아가길 원했지만, 김수영에게 ‘번역’은 냉전적 사고의 일방적인 수용이 아니었다. ‘히프레스 문학론’과 ‘거대한 뿌리’의 경우를 보자. 김수영은 ‘히프레스 문학론’(1964)에서 앨런 테이트의 텍스트를 인용하고 있는데, 동시에 앨런 테이트의 주장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이야기하면서 논의를 전개하기도 한다. 김수영은 ‘생활 현실과 시’(1964)라는 비평에서 ‘힘’의 존재를 강조하기도 했다. 진정한 시는 텍스트 어딘가에 반드시 ‘힘’이 맺혀 있으며, 따라서 진정한 시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는 ‘힘의 소재’를 밝혀내면 된다는 것이 핵심적인 주장이다. 여기에서 ‘힘’은 ‘긴장’, ‘자유’, ‘양심’ 등의 기호들과 함께 ‘(진정한) 시’의 구성요소로 간주된다. 이는 앨런 테이트가 ‘긴장’이라고 개념화한 것을 ‘힘’으로 바꿔서 표현한 것이다. 김수영은 ‘시작노트 4’(1965)에 “당분간은 영미의 시론을 좀 더 연구해 보기로 하자”고 썼고, ‘시작노트 6’(1966)에는 “나는 알렌 테이트의 시론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 텐션의 시론이다”라고 썼다. 이것은 번역이 결코 ‘부업’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인화 옮김, 살림) 표지. 맹문재 제공
김수영은 1964년 3월 잡지 <신세계>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의 일부를 번역해서 실었다. 이 책은 소설가 김이석이 “번역을 해서 팔아먹으라고 빌려준 것”(‘마리서사’)인데, 김수영은 책을 읽으면서 ‘이상한 흥미와 영감’을 느껴 1964년 2월 ‘거대한 뿌리’에서 “나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번역 경험은 김수영의 텍스트에 즉각적인 영향을 끼쳤고, 이 ‘연애’의 결과 김수영은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거대한 뿌리’)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비숍의 텍스트는 서양인의 시선에 비친 조선의 풍경이었으나, 김수영은 그 풍경을 통해 모든 이념을 뛰어넘는 ‘거대한 뿌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로써 4·19 직후에 표출된 냉전 자체에 대한 부정―“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가다오 나가다오’)―은 ‘무수한 반동’에 대한 긍정을 거쳐 ‘거대한 뿌리’에 대한 재발견으로 귀착되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김수영은 ‘번역’에 열중했다. 1960년대에 그는 신동문과 가깝게 지내면서 ‘신구문화사’가 기획한 각종 ‘전집’ 번역에 참여했다. 당시 신구문화사는 ‘전집’의 시대를 맞이하여 <세계전후문제작품집>(1960), <노벨상문학전집>(1964), <현대세계문학전집>(1968) 등을 연이어 출간했는데, ‘영어’ 실력과 문장력을 모두 갖춘 김수영이야말로 최상의 조건을 지닌 번역가였다. 신동문은 유독 김수영과 신동엽을 좋아했다. 생의 마지막 날에도 김수영은 번역원고를 들고 신구문화사를 찾아갔다. 그 무렵, 김수영은 ‘전통’은 오래된 것의 단순한 긍정이 아니라 새롭게 발견되어야 하는 것임을, 그리고 서양이나 일본을 배척하는 부정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가 내세운 ‘전통’과 ‘뿌리’는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부정이었다. 이것이 바로 김수영의 문학을 당대의 전통주의, 또는 세계주의와 구분 짓는 특징이다. 김수영이 이것을 서양, 즉 중심을 ‘번역’하면서 깨달았다는 사실이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고봉준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부교수
이 한국문학사
지극히 시시한 발견이 나를 즐겁게 하는 야밤이 있다오늘 밤 우리의 현대문학사의 변명을 얻었다이것은 위대한 힌트가 아니니만큼 좋다또 내가 ‘시시한’ 발견의 편집광이라는 것도 안다중요한 것은 야밤이다
우리는 여지껏 희생하지 않는 오늘의 문학자들에 관해서너무나 많이 고민해 왔다김동인, 박승희 같은 이들처럼 사재를 털어놓고문화에 헌신하지 않았다김유정처럼 그밖의 위대한 선배들처럼 거지짓을 하면서소설에 골몰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덤핑 출판사의 20원짜리나 20원 이하의 고료를 받고 일하는14원이나 13원이나 12원짜리 번역일을 하는불쌍한 나나 내 부근의 친구들을 생각할 때이 죽은 순교자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우리의 주위에 너무나 많은 순교자들의 이 발견을지금 나는 하고 있다
나는 광휘에 찬 신현대문학사의 시를 깨알 같은 글씨로 쓰고 있다될 수만 있으면 독자들에게 이 깨알만 한 글씨보다 더작게 써야 할 이 고초의 시기의보다 더 작은 나의 즐거움을 피력하고 싶다
덤핑 출판사의 일을 하는 이 무의식 대중을 웃지 마라지극히 시시한 이 발견을 웃지 마라비로소 충만한 이 한국문학사를 웃지 마라저들의 고요한 숨길을 웃지 마라저들의 무서운 방탕을 웃지 마라이 무서운 낭비의 아들들을 웃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