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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야기는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는가

등록 2021-11-19 04:59수정 2023-01-02 15:14

[한겨레Book] 나의 첫 책 - 김연수
박정희 죽음 떠올리며 쓴 첫 소설
책 읽으며 묵은 세계관에 균열
소설가 김연수.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소설가 김연수.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와 함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그 이전의 삶은 단편적으로만 기억난다. 그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텔레비전이고 라디오고 장송곡만 나오는 통에 그 일주일의 기억은 그저 검정색이다. 다들 시청 분향소에 간다기에 나도 따라갔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 대통령 치하에서 9년을 살았지만 대통령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몇 년 되지 않았기에 울려야 울 만한 추억이 없었다. 다만 다들 울고 있기에 눈치가 좀 보였을 뿐.

그들은 왜 울었을까? 그 이유는 나중에야 짐작할 수 있었다. 대통령이 죽자, 아버지는 우리 형제에게 신문 스크랩을 권했다. 살아오는 동안 몇 번의 급변 사태를 경험한 분이니까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되리라 생각하셨던 듯하다. 1979년 10월26일자 신문부터 시작한 스크랩은 다음해까지 이어졌다. 김재규의 현장 검증, 사북 사태, 김재규 사형 집행 등등 스크랩할 사건이 많았다. 그러다가 1980년 5월이 됐다. 우리 초등학교에 계엄군이 트럭을 타고 들어왔다. M16을 든 진짜 군인들이었다. 그리고 신문에는 ‘광주 일원 소요 사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그 무렵,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알게 됐다. 대학생이 된 뒤, 우연히 그 스크랩북을 읽었다. 스크랩된 기사들 안에서는 어떤 논리적 모순도 없었다. 모순은 그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야지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일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거짓된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그 세계의 지배적인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야만 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정교하게 짠 이야기 안에 넣어두기만 하면 인간은 그것을 진실로 믿고 살아간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서거한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의 눈물은 진실이었다. 그들은 통념의 이야기 바깥을 상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한 사람의 신념 체계 역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신념은 대개 통념에서 온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우리 머릿속의 생각들은 꽤 많다. 돈을 많이 벌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압도적이다. 자라면서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에 그 생각에 맞선다는 것, 그 통념의 이야기 바깥을 상상하고 빠져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그런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내게 해독제가 되어준 것은 책이었다. <월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남부군> 같은 책들은 나를 둘러싼 신념 체계에 균열을 일으켰다. 한 번의 충격으로는 부족했다. 더 많은 책들이 필요했다. 나의 묵은 세계관에 더 많은 균열을 일으킬 책들을 찾아 도서관을 헤매다녔다. 정신적 바이러스라는 개념이 처음 떠오른 것은 그 무렵이었다. 만약 그런 책들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사회가 내게 주입한 이야기 속에서 살아갔을 것이고, 더 중요하게는 내 다음 세대들에게도 내가 들은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전해줬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이러스에 감염돼 타인에게도 그것을 전염시키는 존재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는 언제나 세계의 끝에 매료됐다. 그것은 이야기의 끝을 뜻했다. 하지만 세계의 끝까지 간 사람들은 거기서 이야기의 종말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역사는 그렇게 반복된다. 차츰 나는 통념의 이야기에 균열을 내는 일의 목적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끝을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한 채, 이야기가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는가에 대해 쓰고 싶었고, 박정희의 죽음이 떠올랐다. 그 죽음에서 시작한 소설이 나의 첫 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다.

소설가

그리고 다음 책들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지금까지 배운 역사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어 쓴 단편소설들을 모았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은 우연도 이야기로 만들면 필연이 될 수 있으며,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 역시 우연을 재구성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 것이며,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어 언젠가 우리는 그 끝을 지나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소설들이다. (문학동네, 2016)


밤은 노래한다

1930년대 만주는 혼란의 공간이었다.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나타나 자신의 이야기만이 진실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1930년대 만주를 들여다보며 진실은 무자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신만은 진실을 안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끔찍한 일이다.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문학동네, 2016)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입양아다. 그가 출생의 비밀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한 인간의 정체성은 서로 충돌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논리적으로 재구성하며 평생에 걸쳐 만들어가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이렇게 만든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이야기에 맞서 싸우는 것이 바로 삶의 행로다. (문학동네, 2015)



일곱 해의 마지막

시인 백석의 절필을 이해하는 데 3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그의 절필은 내게 우화처럼 다가왔다. 그는 실제로 세계의 끝까지 간 사람이었다. 삼수가 바로 그곳이다. 사람들은 그가 더이상 글을 짓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가 더 이상 글을 짓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시작은 서정시조차 쓰지 못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정치 체제 때문이었겠지만, 어느 순간 그는 쓰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세계의 끝에서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지 않을 수 있는 그 힘을 나는 우러러본다. (문학동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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