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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브렉시트’가 바퀴벌레들의 음모였다고?!

등록 2021-11-26 05:00수정 2021-11-26 19:57

카프카 단편 ‘변신’ 오마주한
영국작가 이언 매큐언 풍자소설 출간
영국 소설가 이언 매큐언이 카프카 단편 ‘변신’에 대한 오마주 형식으로 영국의 ‘브렉시트’ 사태를 풍자한 2019년작 소설 <바퀴벌레>가 번역되어 나왔다. EPA 연합뉴스
영국 소설가 이언 매큐언이 카프카 단편 ‘변신’에 대한 오마주 형식으로 영국의 ‘브렉시트’ 사태를 풍자한 2019년작 소설 <바퀴벌레>가 번역되어 나왔다. EPA 연합뉴스

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l 문학동네 l 1만2500원

“그날 아침 영리하지만 전혀 심오하지는 않은 짐 샘스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거대 생물체로 변신해 있었다.”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의 소설 <바퀴벌레>의 이 첫 문장은 물론 카프카의 단편 ‘변신’에 대한 오마주다. 그런데 카프카의 단편에서는 사람인 그레고르 잠자가 바퀴벌레를 연상시키는 흉측한 갑충으로 변신한 반면, 매큐언의 소설에서는 그 방향이 거꾸로다. 바퀴벌레가 “거대 생물체”인 인간으로 바뀐 것이다.

매큐언은 2019년작인 이 소설을,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비꼬기 위해 썼다고 밝혔다. 총리 짐 샘스의 몸을 뒤집어쓴 바퀴벌레와, 그와 마찬가지로 각료들의 몸속으로 들어간 동료 바퀴벌레들이 갖은 술수와 책략을 동원해 영국을 망가뜨리는 결정을 내리는 과정은 영국 보수당 정부가 주도한 브렉시트를 대하는 매큐언의 비판적이며 절망적인 시각을 알게 한다.

“돈의 흐름을 역행시키면 전체 경제 시스템이, 심지어 국가 자체가 정화되어 부조리, 낭비, 불평등이 일소될 것이다. 주말이 되면 종업원들은 힘들게 일한 시간의 대가로 기업에 돈을 낸다. 하지만 상점에 가면 그곳에서 가져오는 모든 상품에 대해 소매가로 후하게 보상받는다. 현금을 비축하는 일은 법으로 금지된다. 쇼핑몰에서 고된 하루를 보낸 후 은행에 돈을 맡기면 높은 마이너스 이자가 붙는다. 그러니 저축이 이자로 다 깎여나가기 전에 나가서 더 비싼 일자리를 찾거나 직업훈련을 받는 게 현명하다.”

노동에 대한 보수, 소비를 위한 지출, 예금 이자 등 돈의 흐름과 관련된 모든 것을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역방향주의’가 소설 속에서 브렉시트의 역할을 대신한다. 짐 샘스와 그의 동료들은 역방향주의를 정부 정책으로 채택하고 의회에서 법으로 통과시키고자 음모와 협잡을 마다 않는다. 일부러 프랑스와 외교 마찰을 조성하고, 불리한 여론을 되돌리고자 “희롱과 괴롭힘, 외설적인 놀림, 그리고 언어폭력으로 이어진 부적절한 신체접촉에 대한 이야기”를 날조하기도 한다.

“촘촘히 짜인 연속적인 거짓말보다 더 큰 해방감을 주는 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작가가 되는 것이다.”

시나리오처럼 꼼꼼하게 음모를 꾸미는 짐 샘스를 두고 매큐언은 이런 관찰을 내놓는다. 이것은 작가인 매큐언의 자부심일까 자기 비하일까.

‘바퀴벌레 총리’ 짐 샘스가 브렉시트를 최종적으로 관철시킨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를 모델로 삼았음은 분명하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 매우 우호적이며 그를 닮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소설 속에서 트럼프를 모델로 삼은 미국 대통령 아치 터퍼는 짐 샘스가 주도한 외교 위기를 부추기는 트윗을 올려 그를 응원한다. “꼬맹이 실비 라루스 영국 함선들 침몰시키다. 나빠(BAD)!” 프랑스 대통령 실뱅 라루스의 키는 173㎝이며, 사고로(!) 침몰한 영국 배는 함선들이 아니라 프랑스 해역을 침범한 어선 한 척이었다. 트럼프 특유의 터무니없는 과장과 뻔뻔한 왜곡을 떠올리게 하는 이 트윗을 두고 작가는 “의미의 밀도와 세부사항으로부터의 발 빠른 해방을 매끄럽게 결합시킨 시였다”고 작가답게 반어적으로 꼬집는다. 그렇지만 바퀴벌레 짐 샘스는 아치 터퍼의 트윗을 보며 “어쩌면 미국 대통령도 ‘우리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할 정도로 그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급기야 아치 터퍼와 통화하던 중 짐 샘스가 ‘혹시 대통령님도 과거에 다리가 여섯?’이라고 은밀하게 묻는 장면을 보며 미국 독자들은 영국 독자들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법하다.

아치 터퍼의 일화에서 보듯 <바퀴벌레>는 냉소와 풍자를 주로 삼으며 그를 위해 뒤집어 보기와 낯설게 하기의 기법을 적극 활용한다. “어려운 시기에 국가는 확실한 적을 필요로 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정치의 기쁨” 같은 구절들이 정치와 외교에 대한 풍자라면, 트위터를 일러 “페로몬적 무의식의 원시 형태”라 표현하는 데에서는 에스엔에스(SNS) 문화에 대한 조롱과 비판이 읽힌다.

최소 3억 년의 역사를 지닌 바퀴벌레가 보기에 불과 몇십만 년 전에 출현한 호모사피엔스는 “갑자기 부상한 신흥 종”에 지나지 않는다. 바퀴벌레의 미감으로는 인간의 거의 모든 것이 추하고 역겨울 뿐이다. “연약한 살이 골격 외부에 위치하고 (…) 골격은 전혀 보이지 않”는 신체 구조, 그리고 “네 개뿐”인 다리와 “입안에서 젖은 상태로 웅크리고 있는 한 기관, 널빤지 모양의 미끌거리는 고깃덩어리” 같은 신체 기관들 역시 불편하고 끔찍하기는 마찬가지. 그런 외모보다 더 한심하고 딱한 것은 따로 있다. “그들의 욕망은 너무도 빈번히 그들의 지성과 충돌”한다는 것. “모든 생명체 중 가장 합리적인 존재”를 자임하며 “완벽한 조율을 거친 균형잡힌 정신”을 지닌 바퀴벌레와 그렇지 못한 인간의 대비는 조너선 스위프트 소설 <걸리버 여행기> 속 이성을 지닌 말 ‘후이넘’과 비이성적이며 사악한 인간 종족 ‘야후’의 묘사를 떠오르게도 한다.

소설 말미에서 목표를 이룬 짐 샘스와 동료들은 다시 바퀴벌레로 변신해 “방(각료실) 한구석 쓰레기통 뒤”에서 마지막 각료회의를 연다. 이 자리에서 짐 샘스가 하는 연설은 최인훈 단편 연작 ‘총독의 소리’를 닮은 반어적 진실을 담고 있다.

“그들(=인간)이 가난, 오물, 불결함을 포용하는 곳에서 우리는 힘을 키웠습니다. 우리는 우회적인 수단을 통해, 그리고 많은 실험과 실패 끝에, 인간의 파멸에 필요한 전제조건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과 지구온난화는 확실한 전제조건이고, 평화로운 시기에는 고착화된 계급, 부의 집중, 뿌리 깊은 미신, 루머, 분열, 과학과 지성과 낯선 이들과 사회적 협력에 대한 불신을 꼽을 수 있지요. (…)”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영국 소설가 이언 매큐언. EPA 연합뉴스
영국 소설가 이언 매큐언.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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