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지하철역 러셀스퀘어 근처 시장에서 장을 보는 시민들. 브렉시트를 둘러싼 격한 갈등은 사그라들었지만 일반 시민들은 경기 침체와 물가 급등으로 인해 생계비 위기에 시달리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홍대선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제1야당 대표 단식, 체포동의안 통과, 지지자들 시위, 구속영장 청구와 기각. 한국에서 벌어지는 극한 정치적 대립은 예외적 현상이 아니다. 민주주의 수호자를 자처해온 미국에서 3년 전 폭동으로 의사당이 점거됐고 전직 대통령마저 기소됐다. 상대편을 ‘적’으로 간주하는 적대정치가 팽배한다. 민주주의 위기는 패권경쟁, 전쟁과 인플레이션 등 다중위기와 겹쳐 삶의 불안을 키운다. 오는 11일 ‘다중위기 시대: 공존의 길을 찾아’를 주제로 한 ‘한겨레’ 아시아미래포럼에 맞춰 위기 원인을 짚고 대안을 모색하는 기사를 세 차례 싣는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전세계에 적잖은 상흔을 남겼지만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동시에 겪은 영국은 유독 심한 타격을 입었다. 런던은 살인적 물가에 시달렸고, 유럽연합(EU) 의존도가 높은 중소 도시들은 경기침체의 직격탄을 맞았다. 영국 전역에 여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리시 수낵 총리는 ‘불법이민자 무조건 추방’이라는 반난민·이민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영국의 적이 유럽은 아니지 않은가?” 지난 9월1일 오전 런던 중심가 태비스톡 광장에서 엘리베이터 보수 작업을 하던 해리 존스(30)는 “브렉시트로 독일·이탈리아·스페인으로부터 조달하는 부품의 통관 절차가 복잡해졌고 비용도 늘었다.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리프트 엔지니어인 해리는 런던 근교 에식스에서 나고 자란 영국인이다. 그는 “이민자들로 인해 일자리를 잃을까봐 ‘유럽연합 탈퇴’에 표를 던졌는데, 선동 정치에 속은 생각이 든다”고 털어놨다.
2021년 1월1일 영국은 극한 분열 끝에 유럽연합에서 탈퇴했다. 유럽 통합에 대한 오랜 회의와 현실 정치에 대한 실망, 여기에 난민·이민 이슈를 앞세운 극우 정치인들의 선동이 가세했다. 조너선 포티스 킹스칼리지런던 교수(경제학)는 “브렉시트로 거대한 장벽이 생기면서 물가, 투자, 무역 등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의 생산성 증가율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보다 떨어졌고, 기업투자는 2016년 브렉시트 투표 이래로 증가하지 못했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3년을 평가한 보고서에서 “기업투자 감소와 노동력 부족 등으로 인해 1년에 1천억파운드(160조원)의 경제 손실을 초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빅벤과 국회의사당은 런던을 대표하는 상징물이지만, 치솟는 물가와 수년째 동결된 임금으로 생활고를 호소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는다. 홍대선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브렉시트가 영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팬데믹과 동시에 진행된 터라 고용, 물가, 복지, 경제 등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명확히 구분짓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 시민들을 어렵게 한 것은 각종 수당과 공공지출 삭감, 사회복지 축소 등 오랜 긴축 정책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 인플레이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유럽연합과 결별 3년, 영국 사회의 격한 갈등은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지만 일반 시민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앙골라 출신인 우드로 윌슨(45)은 “팬데믹 이전과 비교했을 때 임금은 그대로인데 임대료와 식품비, 전기요금 등 오르지 않은 게 없다”고 말했다. 페덱스 택배기사로 일하며 가족 4명을 부양하는 그는 “이민자를 보는 시선보다 견디기 힘든 건 급등한 운송비와 쪼들리는 생계비”라고 말했다.
런던 지하철역 곳곳에 철도 파업으로 인한 운행 차질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홍대선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지난 8월 영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6.7%를 나타냈다. 같은 기간 미국의 물가 상승률은 3.7%, 한국은 3.4%다. 런던 지하철역인 러셀스퀘어 앞 노점의 주스 가격은 가장 싼 게 5파운드였고, 시민들이 즐겨 찾는 펍에선 기네스 맥주 한잔 값으로 5.9파운드를 받았다. 마트에서 장을 보던 에밀리 이반스(50)는 “요즘 1파운드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고 말했다. 영국 중앙은행이 8월 기준금리를 추가 인상하면서 금리는 1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국회의사당이 있는 빅벤 주변은 시민 불복종 운동인 ‘돈트 페이’(Don’t Pay UK) 등 각종 시위가 끊이지 않는다. 지난 겨울과 봄 공공부문 파업 때는 교사와 간호사, 구급대원 등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9월 들어서도 런던의 주요 역과 플랫폼에는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예고하는 안내문이 곳곳에 붙었다. 브렉시트로 동유럽 이민노동에 의존하던 계절 농업과 유럽으로 수출하던 중소규모 기업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으나, 에너지 위기에다 물가 상승까지 겹치자 시민들의 인내는 임계점에 다다른 모습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절반이 넘는 영국인들이 ‘브렉시트를 후회한다’는 결과가 나오고 있지만, 정작 정치인들은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케빈 그레이 서식스대 교수(국제관계학)는 “키어 스타머가 이끄는 노동당은 2024년 총선에서 강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데도 ‘더 선’(The Sun)처럼 정치색 강한 언론의 비판과 논란이 두려워 문제를 제기할 의향이 없다”며 “그 결과 어떤 종류의 ‘집단적 침묵’이 형성되고 있다. 보수당의 반난민 기조는 점점 더 신랄해지고, 정치는 더 후퇴하고 있다”고 말했다.
■ 반난민·이민 정서 불지른 극우 포퓰리즘
2016년부터 2022년까지 6년 동안 브렉시트는 4명의 총리를 집어삼켰다. 영국 경제가 수렁에 빠져 있을 동안 집권 보수당 정부는 제대로 된 후속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가장 큰 정치적 승리를 거둔 세력은 극우 성향의 정당들이다. 끊임없이 ‘이민자를 쫓아내자’거나 ‘위대한 영국을 되찾자’는 구호를 외쳤던 이들은 트럼프식 포퓰리즘과 닮았다.
이탈리아에선 극우 성향의 첫 여성 총리 조르자 멜로니가 등장하면서 정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탈리아만이 아니다. 독일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과 마린 르펜이 이끄는 프랑스의 ‘국민연합’도 온건 우파를 밀어냈다. 극우 세력은 스웨덴과 핀란드 등 북유럽까지 돌풍을 일으키며 유럽 전역으로 확산 중이다. 극우 정치인들은 “이주자들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줬다” “우리는 인종이 섞이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식의 인종차별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브렉시트에서 보듯 극우 포퓰리즘은 반이민·난민 정서에 기름을 부었고, 가난한 노동자들도 끌어당겼다. 가디언은 “지난 수십년 동안 좌우가 함께 발전시킨 공동체 가치와 소수자 권리가 크게 훼손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 심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난민 수용 문제 등으로 유럽연합과 갈등을 빚은 폴란드의 제2 브렉시트 가능성이 일고 있는 가운데 초유의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 등 악재가 유럽의 균열을 확대시키고 있다. 정치 전문 매체인 액시오스는 “이민·난민 문제에다 경기 불안이 더해지면서 극우 포퓰리즘 세력의 표적이 되고 있다”며 “선거 때마다 이런 정치 세력이 활로를 모색하는 세계적 포퓰리즘 현상이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금 추세라면 내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정치지형이 바뀔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최근 각국 극우 정치인들의 회동과 결속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다. 반난민·이민, 반유럽연합이라는 공통분모를 앞세워 과반 의석을 차지하겠다는 게 이들의 목표다. 영국 싱크탱크 공공정책연구소(IPPR)의 말리 모리스 연구원은 유럽 극우 정당의 부상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기존 정당은 대중들과 연대감이 부족했고 시민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잘 반영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극우 정치인들은 이민·난민 문제 등 기존 정당이 잘 풀지 못하는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극한 대립과 분열 양상을 해소할 방안은 있을까? 모리스는 “쉬운 해결책은 없다. 우선 사회가 평등하고 공정하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공통의 가치를 찾아 갈라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레이 교수는 “불평등 구조가 적대와 혐오에 뿌리를 둔 극단적인 정치 세력의 등장을 촉발했다”며 “우리는 여기에 기반해서는 안 된다. 포용적 성장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의해 유발된 사회 갈등 구조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런던·브라이턴(영국)/홍대선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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