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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올해 나에겐 두 문장이 있었다

등록 2021-12-17 04:59수정 2021-12-17 19:36

[한겨레Book] 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
조애나 러스 지음, 박이은실 옮김 l 낮은산(2021)

오랜 악몽을 꿨다. 손가락질하는 군중을 향해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아무리 소리 질러도 아무도 듣지 않았다. 꿈의 디테일은 매번 바뀌지만, 시나리오는 비슷하다. 문란한 여자라고, 페미니스트라고, 쓸 자격도 없는데 글을 쓴다고 비난 받는다. 잠에서 깨면 온몸이 땀에 젖어 있다. 악을 써도 들리지 않고, 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을 때의 절망감은 깬 뒤에도 쉽게 가시지 않는다.

눈을 뜨자마자 침대맡에 있는 책장에 손을 뻗었다. 실비아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 버지니아 울프의 <울프 일기>, 필리스 체슬러의 <여성과 광기>, 하미나 작가의 <미쳐 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내 절망과 동행하는 책들 사이에서 한 권을 뽑았다. 에스에프(SF) 작가이자 극작가, 비평가, 산문가인 조애라 러스의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이다. 새벽녘 푸른빛에 의지해 펼친 페이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그녀가 썼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뒤에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142쪽) 문장을 곱씹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앉아 첫 문장을 썼다.

올 봄부터 가방에 챙겨 다니느라 귀퉁이가 닳아버린 책은 한동안 내 일상을 채웠다. 글을 쓰기 전, 쓰기 두려울 때, 글이 형편없게 보일 때, 글 수업에 들어가기 전, 수업이 끝난 뒤, 잠들기 전이면 책을 펼쳤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찾는 순간은 주로 불안에 짓눌릴 때였고, 그건 매일 찾아 읽었다는 의미이다.

악몽은 깨어 있을 때도 수시로 들이닥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문단에서 저평가되거나 작가의 사생활에만 집중해서 작품을 삭제해왔던 역사처럼, 여성을 닥치게 만드는 일은 지치지 않고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여의도 정치에서도 비슷한 악몽이 반복된다. ‘그 여자는 사생활에 문제가 있으므로 / 문란하므로 / 국회에서 원피스를 입었으므로 / 정치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러스의 글을 읽으며 악몽을 직시했다. 이번에도 문란한 여자라는 수식어로 입을 막으려고 드네, 이번에는 옷차림으로 자격을 운운하네, 소수자의 권리는 모두가 아닌 ‘일부’만 대변한다는 거짓말은 여전히 먹히는구나.

누가 여자를 포함해 주변화된 존재를 음소거하고, 세계의 소리를 지배하나? 러스는 ‘악몽’이라는 단어로 간단하게 뭉갤 수 없는 차별의 역사를 끈질기게 수집해 꼼꼼히 엮는다. 그들은 여성이 표현하는 일을 금지하고, 행위 주체성을 부정한다. 이중 기준으로 평가하고, 잘못된 범주화로 납작하게 만들며, 고립시킨다. 눈에 띄는 작가는 예외로 취급하고, 본보기를 없애고, 회피하게 만든다. 미학적으로 형편없다고 판단한다.

책에는 내 서재에 있는 익숙한 작가들과 낯선 작가들이 자주 등장한다. 삭제되거나 왜곡된 다른 여자의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기 위해 분노하며 분투한 애정을 나는 실시간으로 읽는다. 그 마음이 전해져 책을 읽고 나면 꼭 쓰고 싶었다. 오랜 악몽을 동행하는 든든한 선배가 곁에 있을 때, 첫 문장을 쓸 용기가 생기니까.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자들은 쓴다. 살기 위해, 죽는 그 순간까지 살기를 멈추지 않기 위해, 존재하기 위해.”(18쪽) 올해 나에겐 이 두 문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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