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배 당한 그는 교회 지하실에서 사백여 매를 써서 출판사에 넘기고 구속됐다. 백민 지음 <문답으로 풀어본 문학이야기>(1990), 노동자와 대화하는 형식으로 쓴 이 책이 연대로 보면 그가 낸 첫 책이다. 석방된 이후 간첩이었던 장기수 김진계 할아버지 이야기를 쓴다. 출판사에서 녹음해준 테이프를 듣고, 동해 사천에서 두어 달 할아버지와 지내면서 쓰고 고쳐서 장편실명소설 <조국>(1990)을 낸다. 그가 일본에서 10여 년 지내는 동안 이기영, 한설야, 이태준 등 귀중한 증언이 담긴 <조국>은 소리없이 절판됐다.
일본에서 그의 문장은 점점 신주쿠체로 바뀌었다. 한글 처음 배운 외국인이 쓴 글 같다, 진짜 본인이 쓴 글이냐, 그가 글을 써서 한국에 보내면 이상한 말만 들었다. 우리말과 일본어 사이에서 그는 꿈에서도 어기죽거렸다. 박사학위 받고 두툼한 하드카버 학술서 몇 권을 낸 그는 깊은 늪에 빠진다. 내 논문을 과연 몇이나 읽을까, 논문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될까. 논문 쓰는 시간보다 노숙인에게 밥 나누는 시간이 그에게 훨씬 보람 있었다.
방황하는 그를 알아본 스승 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그가 궁금해 하는 1923년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지역을 안내했다. 여러 곳을 답사한 그는 조선인 학살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스승 덕분에 학자가 해야 할 일을 깨닫는다.
일본어로 <한국현대시의 매혹>(2007)이란 책을 내고 그는 강연 요청을 받는다. 일본의 도서관이나 대학에서는 늘 ‘윤동주’를 강연해달라고 한다. 1990년 4월부터 일본 현대문 교과서에 실린 윤동주 시를 많은 일본인들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는 윤동주를 그저 청소년들이나 좋아할 시인 정도로 하찮게 여기고 적당히 강연했다. 어느날 윤동주를 좋아하는 일본인들 앞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란 말이 뭔 뜻인지 궁금해졌다.
우에노 공원에서 홈리스들에게 오니기리(삼각김밥) 나눠주는 일을 할 때마다 그는 그들 몸에서 풍기는 오줌에 버무린 쉰 ‘다꾸앙’(단무지) 같은 냄새가 일주일 동안 몸에 스며 빠지지 않아 괴로웠다. 문득 예수도 석가도 이런 이들과 함께했겠지, 순간, 오줌 쉰 냄새가 코끝에서 서서히 달콤한 바닐라 아이스크림 향기로 바뀌는 신기한 체험을 한다. 지금도 요양원이든 노숙인 숙소든 어려운 곳에 가면 그의 코끝에는 아이스크림 향기가 어른거린다. 부잣집 아들 윤동주가 바로 이런 체험을 했겠구나, 가슴이 훈훈히 차올랐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이 구절은 책에서 나온 문장이 아니다. 체험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문장이다.
그날로 그는 윤동주를 다시 읽는다. 무시하던 청년 시인의 시에서 그간 몰랐던 알짬들을 깨달으면서 그는 울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한글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쓸 수 있을까. 런던 홈리스 빈민가에서 쉬운 영어를 다시 익혔던 조지 오웰의 문장, 개구리 소리라도 담으려 했던 권정생의 문장을 새로 흉내내며 쉽고 정확한 우리말을 익힌다.
윤동주 이야기를 2년간 월간지에 연재하고, 연재글을 강연하여 ‘~습니다’ 체로 푼다. 그 과정을 거쳐 나온 책이 < 처럼 : 시로 만나는 윤동주 > (2016)다. 탄생 백주년이 되는 해 2월 16일 기일에 맞추어 나오자마자 그는 뇌혈관 박리로 혈관이 막혀 병원에 입원한다. 의사는 그에게 고개를 갑자기 뒤로 젖힐 때 박리가 생길 때가 있다며, 혹시 권투했냐고 묻는다. 글을 쓰다가 목을 뒤로 젖히는 습관이 있던 그는 “피로 쓴 책을 사랑한다”는 니체의 말을 이상한 방식으로 체험한 것이다. 피로 쓴 < 처럼 > 을 그는 자신의 첫 책으로 여긴다. 이후 매년 2월 16일 꽃샘추위 윤동주 시인 기일에, 윤동주를 공부한 육십여 명과 그는 달동네에 연탄 돌리는 모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를 6년째 하고 있다.
이후 <김수영, 시로 쓴 자서전>(2021)을 내고 이번엔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린다. 침을 못 삼키고, 후각 미각이 사라진 채, 삭신 구석구석 시대의 염병에 결리며 다시 글쓰기를 벼린다.
출판이란 아마득한 난바다를 항해할 돛배의 운명과 비슷하다. 그에게 첫 책은 아직 영혼의 부두에 묶여 출항을 기다리는 미발간이다. 당연히 그는 책을 낼 때마다 첫 책을 낸다. 난바다로 향할 그의 모든 첫 책은 아직 미발간이다.
시인, 숙명여대 교수
좋은 언어로: 신동엽 평전(소명출판 , 2019)
1981년 스무살 때 야학 교실 서가에 꽂혀 있던 두툼한 시전집을 우연히 손에 쥔다. 첫 구절을 펼쳤다가 끝까지 정신없이 읽었던 그 책은 신동엽 시인의 서사시 <금강>이었다. 그후 사십여 년간 신동엽 시인을 사숙하고 연구했다. 이 책은 시인의 부인 인병선 여사가 자료를 공개해주고 원고를 고증해주셨기에 더욱 소중하다. 그는 현재 신동엽학회 학회장으로 있다.
그늘: 문학과 숨은 신(새물결플러스 , 2012)
문학과 종교는 본래 하나로 출발했다. 모든 종교는 언어, 특히 시(詩)를 잉태하여, 텍스트를 낳았다, 그에게 문학과 종교 나아가 심리학과 역사는, 그 몸의 눈과 영혼, 그리고 마음씀이나 발바닥 같기에. 한 몸을 따로 떼어 생각한 적이 없다. 문학 작품을 ‘숨은 신’이라는 시각에서 풀어쓴 에세이다.
서른세 번의 만남, 백석과 동주(아카넷 , 2020)
윤동주 시인에 관해 책 세 권을 냈다.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 <나무가 있다: 윤동주 산문의 숲에서> 이어서 이 책 <서른세 번의 만남, 백석과 동주>가 세 번째다. 백석의 시 33편이 실려 있는 시집 <사슴> 전체를 윤동주는 필사하며 시를 공부한다. 이후에도 윤동주가 읽은 서적, 인물, 사상에 관해 그는 계속 책을 쓰려 한다. 올해 윤동주가 거쳐 간 공간을 분석한 문학지도 <윤동주: 공간의 토포필리아>(아르테)가 나온다.
김수영 , 시로 쓴 자서전(삼인 , 2021)
‘폭포’ 한 편밖에 이해할 수 없던 황잡한 그의 머리 위에 김수영 시들이 어느 날 번개처럼 쏟아졌다 . 김수영이란 , 부조리한 세상에 맞짱 뜨는 실존이 체험한 이 세상 모든 인문학 박물관이다 . 김수영 시를 김수영 시로 풀면서 , 김수영과 그의 시대에 다가가도록 기획한 교양서가 이 책이다 . 이 책 이후에 <니체와 김수영>을 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