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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한문학에서 왜 서구 근대를 찾으려 했던가

등록 2022-04-15 05:00수정 2022-04-15 10:37

[한겨레Book] 나의 첫 책—강명관

조선 후기 여항문학 연구
‘근대적인 것’ 기대했지만…

강박적인 선입견이 더 문제
의문과 과제 안겨준 첫 책
인문학 연구자 강명관.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인문학 연구자 강명관.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박사 논문의 제목을 그대로 옮긴 책이 나의 첫 책이다.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창작과비평사, 1997)인데 여항문학이라면 소수 전공자 외에는 대부분 모르실 것이다. 여항인(閭巷人)의 문학이란 뜻이다(閭巷은 市井이란 뜻). 여항인은 대체로 기술직중인(역관과 의관)과 경아전(서울 중앙관서의 서리)을 싸잡아 말한다. 곧 이들이 주축이 된 시정의 한시문학이 여항문학이다.

한문학은 원래 사족의 문학인데 17세기가 되면 여항인이 차츰 작가군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것은 사족의 문화 독점을 해체하는 느낌이 있다. 그러니까 중세의 해체, 달리 말해 근대를 알리는 신호로 ‘오해’될 수가 있다. 최초의 여항문학 연구자 구자균 선생이 기술직 중인과 경아전을 묶어 ‘평민’이라 지칭하면서 <조선평민문학사>를 썼던 것 역시 다름 아닌 한국사 내부에서 근대를 찾는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구자균 선생은 작품 자체를 연구하지는 않았고, 작가와 시사(詩社, 한시를 짓는 문학서클)만 시대적으로 열거하는 데 그쳐 평민문학의 성격을 해명하지는 않았다.

구자균 선생 이래 여항문학을 연구한 논고는 드문드문 나왔지만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자료 전체가 공개되지 않았고 따라서 여항문학의 전모도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경제적 문화적 배경 역시 언급되지 않고 있었다. 나의 의도는 우선 자료를 광범위하게 섭렵하여 그 전모를 드러내고, 경제적 문화적 배경을 충실히 탐색한 뒤 그 바탕 위에서 여항문학의 성격을 해명해 보자는 것이었다. 성과는 있었다. 나름 여항문학의 전체상을 포착하고 이들의 경제적 문화적 성장 과정과 그 근거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이 수많은 시사를 만들어 활동하고 시선집(詩選集)을 엮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경제적 문화적 역량의 상승에 기초한 것이었다.

여항문학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자신들의 경제적 문화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출세가 봉쇄된 데서 오는 불만을 낭만적 언어로 표현한 작품들, 또는 사회모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 작품들이었다. 19세기 이후에는 현실과 유리된 고고한 탈속적(脫俗的) 심미적 세계를 지향하기도 하는 작가까지 나타났다. 당연히 책에 이런 내용을 주저리주저리 써 놓았다. 그런 것이 거기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적지 않게 당혹스러웠다. 이런 것들은 사족의 한시에도 넘쳐나는 것들이었다. 나 역시 별수 없이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해서 여항인의 문학에서 무언가 근대를 지향하는 성격을 찾으려 했던 것인데,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도 물론 알고 있었다. 경아전은 17세기 중반 이후로 정치권력을 독점한 경화세족(京華世族)의 겸인(傔人, 청지기)으로서 중앙관서의 서리가 된 자들이었다. 그들의 경제적 기반은 관례화된 부정에 있었다. 기술직 중인의 주류인 역관 역시 국가권력의 지원으로 북경과의 무역에서 돈을 번 자들이었다. 체제에 대한 기생성이 현저했다. 이들에게 역사적 변화의 동력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다. 기생성이 그들 문학에 한계를 지웠던 것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불만족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내가 디디고 있는 내재적 발전론에 있었다. 조선 후기에서 무언가 근대에 해당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적 생각이 문제였다. 근대는 서구사에서 추상한 역사 발전의 한 단계였다. 서구와 아무 상관 없이 존재했던 한반도의 역사에서 내가 왜 서구의 근대를 찾아야 하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선입견을 버리자 내재적 발전론이 역사적 현상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 첫 책은 한 가지 주제를 온전하게 마무리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문과 과제를 잔뜩 안겨주었던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의 앞으로의 소업이 정해졌던 것이다.

인문학 연구자

그리고 다음 책들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소명출판, 2007)
명나라 말기의 공안파(公安派)의 비평이 한국한문학에 수용되는 과정을 밝힌 책이다. 박지원의 독특한 비평과 창작도 공안파 비평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 책으로 내셔널리즘과 근대주의에 입각한 국문학사 연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열녀의 탄생(돌베개, 2009)
열녀는 죽음 혹은 자학적 행위로 한 남성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천명하는 여성이다. <열녀의 탄생>은 조선시대에 남성-사족에 의해 열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한 책이다. 여성성이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적 타자 곧 남성-사족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푸른역사, 2003)
지배층의 역사, 제도사 같은 것이 아닌 사람 냄새 나는 조선의 일상적 현실이 궁금했다. 도둑, 도박, 음주, 성(性), 깡패 같은 시시한 이야기를 담았다. 앞으로 이것들 중 좀 더 소상히 써야 할 주제들은 따로 책으로 쓰려고 한다.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휴머니스트, 2017)
‘허생전’의 주제가 화폐와 국가권력이 폐기된 아나키한 사회의 건설에 있음을 밝힌 책이다. 재래의 통설을 엄밀한 실증을 통해 재검토하고, 실학자로 규정된 박지원의 사유에서 자본주의적 근대의 역사적 정당성을 도출하려는 기존의 주류적 견해를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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