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개화는 가라
한국 근대 유학 탐사
노관범 지음 l 푸른역사 l 1만5000원
오늘날 한국 사회에 익숙한 한국 근대 유학의 이미지는 전근대의 정지된 정신이다. 때로는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고 조선을 망하게 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역사학자 노관범(사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는 이런 인식에 대해 ‘실상은 다르다’라고 말한다. 지은이는 <껍데기 개화는 가라>에서 잊힌 한국 근대 유학자들을 불러내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팽팽한 긴장을 놓치지 않고 시대와 맞섰던 치열한 정신을 소개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조선 유학을 다시 보게 하는 ‘한국 근대 유학 안내서’이자 ‘한국 근대 유학을 위한 변명’이라 할 수 있다.
유교 지식인 18인의 문집에서 인상적인 글을 선별해,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다시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감상문을 썼다. 문선과 평설을 겸한 이 책의 부제가 ‘한국 근대 유학 탐사(史)’인 까닭이다. 책에 실린 글은 크게 ‘세상’, ‘역사’, ‘학문’ 3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 ‘세상’에는 개화의 대도를 모르면서 엉터리 개화를 만들고 있는 세태에 대한 비판과 제언, 2부 ‘역사’에는 근대 유학자들의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글, 3부 ‘학문’에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으려는 유학자들의 안간힘을 담은 글 각 6편씩이 실렸다. 잘 번역된 근대 유학자들의 원문도 흥미롭지만, 풍부한 지식으로 원문의 시대적 배경과 그 의미를 조곤조곤 일러주는 지은이의 해설을 읽는 맛도 남다르다.
당대의 껍데기 개화의 문제점을 통렬히 비판한 호남 곡성 정일우의 글, 임오군란부터 경술국치까지 국망의 역사를 총평한 호남 능주 양재경의 글, 신해혁명 직후 ‘중국혁명의 여파’를 분석하며 공화정에 대해 논한 호서 청양 임한주의 글, 한문으로 번역한 당대의 세계사 <태서신사남요>를 읽고 그 허점을 꼬집은 영남 봉화 권상규의 글 등을 소개하며 지은이는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가 알고 보니 근대 성찰의 선구적 유학자였다’라고 말한다.
“갑오개혁 이후 우리 사회는 개화! 개화! 하며 제도를 개혁하고 학교를 설립하며 개화에 노력했지만 어째서 나라가 쇠망에 빠졌는가? 대충 보고 설익은 지식으로 개화를 치장하고 개화를 행세한 구이(口耳)의 개화, 그 껍데기 개화 때문이었다.” 지은이는 ‘껍데기 개화의 거대한 폐해’를 논한 1906년 7월6일자 <황성신문> 논설을 전하며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과연 껍데기 개화에서 완전히 벗어났는가’라고 거듭 묻는다.
박영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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