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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희망은 벽돌만 한 빛으로도 충분했다

등록 2022-06-10 05:00수정 2022-06-10 11:27

나의 첫 책 │ 소설가 김중미
IMF 와중 장밋빛 전망 화났을 때
창비 공모전 광고 보고 쓰기 시작

결말 내지 못하다 마감 전날 완성
20년의 부담, 이젠 기쁨 누리고 싶어
소설가 김중미. <한겨레> 자료사진
소설가 김중미. <한겨레> 자료사진

‘나의 첫 책’은 창비아동문고 183, 184번째인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내 이름이 ‘창비아동문고’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소설 &lt;괭이부리말 아이들&gt;.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

창비아동문고를 처음 만난 것은 1987년이었다. 인천의 만석동에서 공부방을 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한 선배가 창작과비평사에 다니던 지인에게 창비아동문고 100권, 두 질을 얻어주었다. 그 책을 개원 준비를 하는 틈틈이 읽었다. 어떤 책은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데려갔고, 어떤 책은 더 깊고 넓은 동화의 세계를 만나게 해주었다. 100권을 읽는 동안 누린 행복을 어서 아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공부방에 온 아이들은 혼자서 책을 읽어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이 책읽기의 행복을 알 수 있도록 책을 읽어주기로 했다. 처음 선택한 책은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였다. <행복한 왕자>는 초등학교 때 부모님께 선물 받았던 책이다. 그 책이 표지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으며 앞으로 제비로 살지, 행복한 왕자로 살지 고민을 했다. 공부방 아이들에게 읽어줄 때마다 어린 시절 꿈이 되살아났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버틸 힘이 되었다.

1999년 봄, 아이엠에프로 벼랑 끝까지 몰렸던 이웃들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벼랑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그 와중에도 정치권과 언론은 한국 경제가 되살아났다고 장밋빛 전망을 늘어놓았다. 화가 났다. 억울했다. 그때 운명처럼 <한겨레>에서 ‘창비 좋은 어린이 책 공모전’ 광고를 보았다. 가난한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름방학을 맞아 북적거리는 공부방에서 틈틈이 글의 얼개를 짠 것을 시작으로 밤마다 글을 썼다. 석 달이 지나 원고 마감일이 다가왔는데 작품의 결말을 내지 못해 초조했다. 그때 내 머릿속에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공장 건물 안을 비추던 벽돌만 한 아침 햇살이 떠올랐다.

1996년에 한겨레문화센터의 아동문학창작학교에 잠깐 다닌 적이 있었다. 동화작가가 되려던 것은 아니었다. 재개발이 되어 사라질지 모르는 만석동의 시간과 사람들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글쓰기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강사가 권오삼, 이오덕, 윤기현, 원종찬, 이재복 같은 아동 문학가들이라는 데에 혹했다. 강의만 듣고 창작실습 과정은 적당히 넘어갈 깜냥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단편동화를 사흘 만에 한 편 써서 모둠 합평 시간에 가져가야 했다. 그때 내 동화를 읽은 이오덕 선생님이 동화에는 어린이들에게 줄 희망이 담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이들의 현실이 바뀌지 않는데 어떻게 억지 희망을 담느냐고 ‘마음속으로’ 항의를 했다. 그 합평 이후 아동문학창작학교에 더는 나가지 못했다. 둘째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결말을 앞에 두고 자꾸만 이오덕 선생님의 그 말씀이 떠올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희망은 벽돌만 한 빛으로도 충분했다.

결말을 완성한 다음 날이 공모전 마감이었다. 퇴고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출판사로 보냈는데 운 좋게 당선이 되었다. 2002년 그 책이 공중파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되었고, 내가 들인 노동에 비해 너무 과한 인세가 들어왔다. 방송은 그 인세가 ‘괭이부리말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일 거라고 했지만, 나는 동네에서 이웃이 아닌 자선사업가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인세의 절반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나머지는 돈이 필요한 곳에 나누고 또 나누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는 공부방을 위해서도 쓰고, 귀농하면서 진 빚도 갚고, 농사지을 땅도 조금 마련했다. 지난 20년 동안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작가라는 것이 부담스럽고 무거웠다. 그러나 이제라도 나를 작가로 이끈 창비아동문고에 내 작품이 있다는 기쁨을 마음껏 누려야겠다.

소설가

그리고 다음 책들

소설 &lt;모두 깜언&gt;.
소설 <모두 깜언>.

모두 깜언(창비, 2015)

2001년 강화 양도면으로 귀농을 했다. 공동체의 결정이었으나 농촌의 삶을 선택한 덕분에 계속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었다. 강화에 간 지 13년 만에 농촌을 배경으로 쓴 청소년소설을 썼다. 청소년소설뿐 아니라 성인소설에도 지금의 농촌이 배경인 작품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소설 &lt;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gt;.
소설 <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

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낮은산, 2016)

이 작품을 쓰고 나서 나는 좀 더 세심하고 따뜻한 사람, 이별을 딛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주인공은 지금도 내 곁에 있는 우리 고양이들이다. 그러나 이 책은 용산 남일당, 세월호로 가족과 친구를 잃은 이들, 또 2016년 1월3일 바다로 간 뒤 영영 돌아오지 않은 우리 공부방 어부 이형석을 위한 애도이다.

소설 &lt;곁에 있다는 것&gt;.
소설 <곁에 있다는 것>.

곁에 있다는 것(창비, 2021)

가난은 철 지난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애써 다시 가난의 시간을 마주하지 않으면 희망을 위한 한 걸음을 뗄 수 없다. 열일곱이었던 내게 문학이 누구의 편인지를 알려 주었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은강. 아직도 은강에 사는 청소년들의 시선으로 노동과 가난, 여성들의 연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소설 &lt;너를 위한 증언&gt;.
소설 <너를 위한 증언>.

너를 위한 증언(낮은산, 2022)

성폭력을 다룬 소설이다. 이렇게 짧은 문장 뒤에 숨어 있는, 혹은 감춰진 이야기를 누군가는 떠올릴 것이다. 오랫동안 쉽게 지워진, 그러나 지워져서는 안 되었을 이름을 되살리고 싶었다. 애써 살고자 했으나 죽음을 선택한 이들을 우리의 곁으로 불러와야,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이 계속 살아갈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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