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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출판되기 힘들 거야” 지도교수는 말했다

등록 2022-07-08 05:00수정 2022-09-02 12:17

나의 첫 책 │ 그림책 작가 이수지
출간 20년 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영국유학 중 기획, 지도 교수는 우려

‘그림+책+예술’ 어딘가의 접점부터
‘창작자로 살 수 있나’ 고민까지 담겨
이수지 작가. 2021년 8월6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알부스 갤러리에서 전시 중 자신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수지 작가. 2021년 8월6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알부스 갤러리에서 전시 중 자신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너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작업은 흥미로워. 모두 책에 관한 재미있는 주제들이야. 그런데 너는 이 모든 주제를 한 책 안에 쓸어 넣으려고 하는구나. 이 주제들을 다섯 개 정도로 쪼개 각각 다른 책으로 만들어 보는 게 어때?”

“그럴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다섯 개의 습작보다는 한 권의 책을 완성해보는 경험을 하고 싶어요.”

“너는 학생이야. 지금은 여러 가능성을 탐구해야 할 때야.”

“나는 학생이고 싶지 않아요. 탐구하고 싶지 않아요. 완성해서 출판하고 싶어요.”

“완성한다고 출판되는 건 아니야.”

“그래도 완성하고 싶어요.”

“출판되기 힘들 거야.”

“그래도 해볼 거예욧.”

“….”

“….”

영국의 북아트(Book Arts) 과정 중 지도 교수님과 나눈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회화를 공부하고 이런저런 시도 중에 아티스트 북(Artists’ Books)이라는 장르를 알게 되고 동시에 그림책의 세계에 빠지기 시작한 나는, 그림이면서 책이고, 책이면서 예술의 언저리에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

&lt;이상한 나라의 앨리스&gt;(비룡소, 2015). 이탈리아에선 코라이니(Edizioni Corraini)가 2002년 출간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비룡소, 2015). 이탈리아에선 코라이니(Edizioni Corraini)가 2002년 출간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책을 열면, 막이 열리고 무대 위 검은 머리의 앨리스가 흰 토끼를 쫓는다. 무대의 배경 그림은 미술사에서 실재와 환영을 다룬 명화들이다. 앨리스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채찍질을 당하는 그리스도> 그림 속 원근이 기묘하게 연장된 무대로 떨어지고, 안드레아 만테냐의 <결혼의 방> 천장화를 밟으며 뛰다가, 르네 마그리트의 낯선 물건들 사이에서 유령 토끼에게 사로잡힌다. 환영과 실재가 서로 자리를 바꾸고, 아이도 토끼도 아니거나 혹은 토끼이며 동시에 아이인 무엇이 되어버린 앨리스가 무대 인사를 마치면서 공연은 끝이 나는데, 실은 이때부터 이야기는 새롭게 시작된다.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환영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의 현재가 꿈인지 현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페이지를 넘기는 독자의 손가락이 등장하고, 앞의 꿈을 차례로 무화시키며 “당신이 본 모든 것은 더 큰 꿈의 일부였답니다” 하며 슬며시 독자를 다시 처음으로 돌려놓는 책이다.

이미지는 환영인가? 무대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인가? 책은 그저 글을 담는 그릇인가? 그림책은 그림+책인가? 책은 왜 네모난가? 책을 펼쳤을 때 움푹 패는 한가운데 제본선의 존재를 독자는 왜 모른 척하는가? 책의 형식이 서사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 글이 그림이 될 수 있는가? 그림만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글 없는 그림책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런 그림책도 출판이 될까? 이런 그림책을 만들며 작가로 먹고살 수 있을까? 나는, 창작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 첫 책은 모든 질문으로 터져나갈 듯하다. 날것의 질문과 거친 대답. 하지만 가능한 모든 대답도 역시 첫 책에 들어 있다. 답해보려고 애쓰지 않으면 다음 질문도 생겨나지 않는다.

도서관을 뒤지고, 전시를 보고, 영화를 보고, 스토리보드를 만들고, 종이를 오리고, 그림을 그리고, 무대를 꾸미고, 청소하고, 조명을 빌리고, 사진을 찍고, 암실에서 인화하고, 슬라이드 필름을 스캔하고, 이미지를 수정하고, 프린터를 빌리고, 위로를 받고, 책 바느질을 하고, 표지에 풀을 바르고, 책등에 천을 감싸 그럴듯하게 가제본 책을 만들어 들고 다니다가, 좌충우돌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여 너그러운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손에 이끌려 또 다른 이들의 각종 잔소리를 듣고, 그중 듣고 싶은 말만 새겨듣고 정리하여 겨우 완성한 데이터를 출판사에 보냈다. 그리고 다음 해, 두번째로 간 볼로냐 도서전의 이탈리아 출판사 부스에서 따끈한, 온전한 나의 첫 그림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받아 가슴에 안았다.

이탈리아-영국 1만원짜리 프로모션용 저가 항공을 타고 런던으로 돌아와, 지도 교수님 방을 두드렸다. “선물입니다” 하면서 살포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초판을 건넸다.

출간 20주년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림책 작가

그리고 다음 책들

거울속으로(비룡소, 2009)

책의 한쪽 페이지가 거울이 되어 저편의 나를 발견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한 장면이 새로운 책으로 이어져 이탈리아에서 바로 다음 해인 2003년 출간되었다.


이수지의 그림책: 현실과 환상의 경계 그림책 삼부작(비룡소, 2011)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거울속으로>, <파도야 놀자>, <그림자놀이> 3부작으로 발전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이 작은 책을 펼쳐 봐(제시 클라우스마이어 글, 비룡소, 2013)

앨리스의 “꿈속의 꿈속의 꿈”을 이어서 “책 속의 책 속의 책”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그림책. 책 속 주인공들이 또 다른 책 속으로 가 여행을 펼친다.









름이 온다(비룡소, 2021)

비발디의 사계 가운데 ‘여름’을 오감으로 즐길 수 있는 그림책. 마지막, 커튼콜 장면에서 박수 치며 남아 있는 관객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박수 치던 관객과 동일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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