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자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김영사 제공
1993년 가을의 일이다. 학교에서 박목월 선생 학술 행사가 열린 뒤풀이 자리에서 당시 <현대시학> 주간을 맡고 계셨던 정진규 선생과 처음 인사를 나눴다. 이건청 선생님께서 나를 한시 전공으로 소개하셨다. 정 선생께서 마침 한시로 특집을 준비하던 참인데, 나더러 글을 한번 쓰라고 했다. 그래서 ‘시화, 행복한 시읽기’란 글을 썼다. 바로 다음 달 여러 문학잡지 평론에 내 글이 인용되었다. 첫 글치고 꽤 반향이 컸다. 뜻밖의 반응이어서 얼떨떨했다.
내친김에 연재로 가자 해서 두 달 뒤인 1994년 2월부터 96년 5월까지 2년 넘게 글을 썼다. 여러 제목을 파일로 만들어놓고, 책을 찾아 글감이 나오면 그때마다 메모해 두었다. 당시 나는 한시 이야기만 열심히 했다. 시인이 대부분이었던 독자들은 내 이야기를 자기들 현대시 이야기로 알아들었다. 그들은 한시가 전혀 고리타분하지 않고 너무 모던한 것에 놀랐고, 나는 고전학자로 현대 시인과 실시간 교감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현장 비평에 해당하는 고전 시화(詩話) 자료를 정리해 박사과정 재학 중이던 1988년에 순한문만 700쪽이 넘게 종조 2단 조판으로 <한국역대시화유편>을 펴낸 일이 있었다. 이인로의 <파한집>에서부터 홍만종의 <시화총림>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대 시화를 망라해, 항목별로 카드 작업해서 갈래별로 나눠 편집 조판한 책이었다. 이때 꼼꼼하게 정리했던 시화의 풍부한 예시가 당시 집필에 큰 힘이 되었다.
1980년대 한시 연구는 작가 의식 연구, 그것도 사회의식이나 계층인식에 초점을 둔 연구가 대종을 이뤘다. 논문 제목마다 애민 의식, 현실 인식, 풍자 정신 같은 제목들이 으레 붙어 다녔다. 언어 예술인 한시에서 언어의 미감은 빼고 그 속에 담긴 작가 의식만 그것도 계층성에 입각해서 다루곤 했다. 중국은 어떤가 궁금해서 명동 중화서국에 나가 살펴보았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서조차 한시 연구는 언어 미학에 바탕을 둔 것이 더 많았다. 1980년대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고라도 당시 한국 한문학계의 접근법은 너무 편향적이었다.
당시 필자의 모교인 한양대학교 국문과는 목월 선생의 영향으로 시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고, 시인은 직접 말하지 않고 이미지로 말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한문학계의 이 같은 분위기가 낯설고 싫었다. 언어의 결을 더 섬세하게 살피고, 미감을 따져보는 작업에 몰입했다. 한문학 전공자가 없어 스승이나 선후배의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스러웠던 덕을 크게 봤다.
마침 90년대 이후 문학에서 이념성이 퇴조하던 시대 분위기도 한시 미학산책의 느낌과 맞아떨어졌다. 역대 시화에서 추려낸 다양한 예화들로 현장감을 얹고, 한시의 분석과 감상에서 정서적 연대를 느끼게 했다. 연재 도중 시인들에게 팬레터를 많이 받았다. 충격과 전율을 느낀다고 했고, 한 원로 시인은 ‘폴 발레리의 정신의 건강한 체조 같다’며 격려의 말을 보내왔다.
1996년 8월 솔출판사에서 초판이 간행되었는데, 당시 내 나이가 36살였다. 27년 전의 일이다. 이후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2010년에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개정 신판을 새로 펴냈다. 예시를 바꾸고, 도판을 추가했다. 문장을 모두 고치고 글도 한두 꼭지 새로 썼다. 지금도 대학 시절 한시를 이 책으로 배웠다는 대학원생을 가끔 만난다.
이후로 신문 잡지 연재 방식의 글쓰기를 많이 했다. <삶을 바꾼 만남>, <비슷한 것은 가짜다>, <다산증언첩>, <파란>,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불국토를 꿈꾼 그들>, <나는 나다>와 같은 책들이 모두 지면 연재로 정리된 책들이다. 발표한 뒤 독자의 반응을 들을 기회가 있으며, 책으로 펴낼 때 전반적인 보완 수정이 가능한 점이 연재의 매력이다. 무엇보다 정해진 날짜와 씨름하는 사이 적금 붓듯 따박따박 글이 모이면서 생각이 자연스레 여기에 집중되는 긴장이 좋아서 이런 글쓰기를 오래 계속해왔다. 그 첫 출발이 <한시미학산책>이었다.
한양대 국문과 교수
그리고 다음 책들
비슷한 것은 가짜다(태학사, 2000)
연암 박지원의 산문 미학을 다뤘다. 그 난해하다는 연암의 산문을 꼼꼼히 읽은 글을 모았다. <한시미학산책>에 이어 <현대시학>에서 진행한 연재물을 모았다. 읽고 난 뒤 연암의 압도적인 사유에 놀랐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다산선생지식경영법(김영사, 2007)
다산의 작업 방식, 놀라운 생산력의 비밀을 찾아 파헤쳐본 책이다. 다산 얘기만 하면 틀에 박힌 듯 애민 의식과 청렴 코드로만 말하는 것이 싫었다. 대학원생 논문 작성에 도움을 주려고 썼는데, 기업 쪽에서 더 인기가 있었다.
삶을 바꾼 만남(문학동네, 2011)
다산과 강진 시절 제자 황상과의 만남을 추적했다. 만남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다. 어떤 스승을 만나는가도 중요하지만, 황상을 보면 스승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는 제자도 있다.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김영사, 2022)
다산 공부가 번져서 서학의 바다로 나아갔다. 천주교는 조선 사회에 어떤 자취를 남겼을까? 학문과 종교와 정치가 만나 격렬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그 파장이 어마어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