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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리에게 꼭 이름이 필요한가요

등록 2022-10-07 05:00수정 2022-10-07 22:36

깊은숨

김혜나 지음 l 한겨레출판(2022)

‘나’는 두 사람에게서 도망치고 있다. 두 사람은 연인이고, 나는 그들의 지인이다. 두 사람은 나와 맛있는 음식과 책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 정도야 얼마든 나눌 수 있지만, 그 ‘정도’가 나는 헷갈린다. 그들은 지인 이상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아서. 친구가 뭔지 사랑이 뭔지 헷갈리지만, 그렇다고 둘 사이를 갈라놓고 누구와 사귀고 싶은 건 아니어서 혼란스럽다.

데이트라면 둘을 위해 빠져줘야 하는데, 두 사람은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에 적극적이다. 빠져나가려 해도 기어코 손을 이끈다. 나는 두 사람과 있는 시간이 꿈처럼 즐거운 만큼 불안해진다. 두 사람과 나. 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내게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오지 않은 미래가 두려운 까닭은 결말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비극으로 끝난다 해도 결과를 알 수만 있다면 의연하게 그 한가운데로 걸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결과를 모른다면, 장밋빛 미래라 해도 더 이상 그쪽으로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여경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드라마 속으로 나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스스로 시작하고 끝낼 수 없다면 싹을 잘라버리는 게 나았다.”(42쪽) 나는 제자리라고 믿었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돌린다.

또 다른 ‘나’는 도망치는 상대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그는 내가 다니는 독서토론 수업의 원어민 영어 강사인데, 어느 날 수업이 끝난 뒤 근처 카페에서 함께 달콤한 케이크와 따뜻한 차를 먹게 되었다. 나는 그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어느 날 그는 내게 더 이상 함께 카페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아내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고개 돌린 그를 보며 생각한다. “나는 다만 그와 친해지고 싶었고,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그가 기혼의 40대 남자이고 내가 미혼의 30대 여자라는 사실이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의 정체는 무엇인지,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어떠한 형태인지조차 알 수 없어 답답했다.”(236쪽)

김혜나 작가의 단편 소설집 <깊은숨>의 주인공인 ‘나’들은 관계의 경계를 헤맨다. 관계(특히 남성과 여성 사이)를 로맨스와 섹슈얼한 사인으로 읽는 세상의 독해에 맞서 작가는 욕망과 감정의 틈을 섬세하게 파고든다. 정말 당신(들)과 나, 우리를 표현할 관계가 그것뿐인가요? 정말 우리 사이의 감정은 사랑과 우정 둘 중 하나인가요? 사랑이 무엇이죠? 모든 관계를 혈연, 혼인, 애인, 친구, 동료, 이웃으로 깔끔하게 나눠 감정과 행동을 통제하는 이 세계의 문법에서 길을 잃은 주인공들은 질문을 멈출 수 없다.

“나는, 네 아빠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 비단 문학적인 관점 혹은 철학적인 사유뿐 아니라 네 아빠의 시선, 네 아빠의 취향, 네 아빠의 감정, 그리고 네 아빠의 존재를… 나는 알아가고 싶었어. 그래, 나는 그 존재에 가까이 닿고 싶었어. 그런 욕망을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모르겠어.”(286쪽)

마지막 단편 ‘코너스툴’에 등장하는 ‘나’ 역시 질문한다. 당신의 서사에 닿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을 불결하게 만드는 모든 관념. 나는 우리를 무엇으로 가두려는 모든 시도에 맞서는 그 정직한 혼란 곁에 머물기로 했다.

홍승은/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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