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구할 여자들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과학기술사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하현 옮김 l 부키(2022)
“우리가 냉전에 들인 돈만큼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데 돈을 들였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전쟁에 과학기술을 이용했던 만큼 자연을 살리려고 노력했다면 우리는 더 나은 환경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안 하고 있는 걸까? 되묻게 된다. 폭력보다는 평화가 좋다고 하면서 인류가 늘 선택한 방식은 ‘공존’보다 ‘지배’였다. 자연을 지배하고 여성과 유색인종, 타민족을 지배하고, 과학기술이 여기에 앞장서왔다. 급기야 미래의 과학기술인 인공지능에 지배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에 떨고 있다. 누구나 에스에프(SF)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고 주인 노릇 하는 세상을 자연스럽게 상상한다.
왜 우리는 이토록 인공지능의 지배 서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이 많은데 왜 단번에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걱정하는가? 카트리네 마르살은 <지구를 구할 여자들>에서 기계가 하기 어려운 일을 떠올려보자고 제안한다. 기계는 인간관계에서 감정을 나누고 타인을 돌보는 일에 서툴다. 근력을 사용하거나 계산하는 일은 잘하지만, 흔히 여성적 가치로 불리는 감정 지능이 필요한 업무에 취약하다.
여성과 남성의 직업으로 나눠진 노동시장에서 인공지능의 여파는 성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인공지능이 여성보다 남성의 일자리를 먼저 차지할 것이라고 분석한다. 여성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 산업일수록 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확률이 적다고 말이다. 이처럼 인공지능과 같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 젠더 이슈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 사회적 고정관념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과 4차산업혁명, 일자리 문제에서 젠더 이슈는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다. 책의 지은이는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기발한 질문을 던진다. 여행 가방에 바퀴를 다는 것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100년 전에 발명된 전기차가 왜 휘발유차에 밀렸을까? 인공지능은 체스에서 이기면서 왜 청소는 하지 못할까? 사소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남성중심적 과학기술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인공지능 개발의 역사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체스가 남성들의 전쟁 게임이었으며, 생각하는 기계로 체스가 선택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바퀴 달린 가방이나 전기차와 같은 새로운 발명과 기술혁신은 여성적 가치를 낮잡아보는 사회적 편견에 좌초되었다.
젠더 관점에서 좋은 과학기술은 아직 구현된 적이 없으며 상상 속에 있을 뿐이다. 지은이는 인공지능의 지배 서사를 쉽게 믿는 이유가 기계를 과대평가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과소평가해서라고 말한다. 그동안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하던 인간의 경험을 무시하지 않고 보편적 가치로 재인식한다면 미래의 기술은 달라질 것이다. “극단적인 버전의 미래 예측에서 모든 것이 자동화된다 해도, 돌봐야 할 몸, 인간과의 접촉과 의사소통이 필요한 사람, 격려와 인정, 포옹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는 한 경제에서 인간이 할 일은 남아있다.”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빼앗는 미래가 당연하지 않으려면 여성과 남성, 경제적 가치에 대한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이 책의 원제, “발명의 어머니”는 필요가 아니라 여성성이다. 공감과 연대, 화해, 돌봄의 가치를 추구하는 과학기술이 지구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정인경/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