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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세상에 무해한 기술은 없다

등록 2023-01-06 05:00수정 2023-01-06 10:27

정인경의 과학 읽기

인간이 만든 물질, 물질이 만든 인간
오늘의 세계를 빚어낸 발명의 연금술
아이니사 라미레즈 지음, 김명주 옮김 l 김영사(2022)

한때 우리는 새로운 발명품의 탄생을 찬양했었다. 인간이 이토록 위대한 인공물을 만들다니, 스스로 도취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기술혁신이 마냥 좋은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기술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을 때 우리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인공물과 인간이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만든 물질, 물질이 만든 인간>을 쓴 아이니사 라미레즈는 재료공학자이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과학자다. 그의 시각은 재료공학의 ‘물질’과 인간이 빚어낸 미묘한 ‘사회’ 문제에 머문다. 그는 “나 자신의 생각이 담겨 있지 않은 이야기는 쓰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며, 과학기술에 대한 기존의 서술방식을 답습하지 않았다. 과감히 인간 중심적인 영웅 서사에서 벗어나 물질과 인간, 기술의 성취와 폐해를 대등하게 다루었다.

시계, 철도, 통신케이블, 사진기, 인공조명, 디스크, 유리용기, 컴퓨터는 현대 문명을 지탱하는 발명품이다. 이 책은 8개의 발명품에 핵심 물질을 합성해서 ‘쿼츠’(수정) 시계, ‘강철’ 철도 레일, ‘구리’ 통신케이블, ‘은’ 사진필름, ‘탄소’ 전구 필라멘트, ‘자기’ 하드디스크, ‘실리콘’ 칩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과학기술은 다양한 입장과 경험,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나온 것이다. 책에서 소개하는 물질과 발명품은 우리의 빈약한 상상력에 지적 활력을 불어넣는 단서가 된다. 예컨대 쿼츠 시계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루이 암스트롱의 재즈로 연결되었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조합이지만 물질과 인공물, 과학, 음악이 어우러져 우리에게 심오한 통찰을 준다.

쿼츠 시계는 더 정확한 시계를 갖고 싶은 욕망에서 발명되었다. 하지만 시계가 정확해질수록, 그에 맞춰 사회가 돌아갈수록 현대인은 오히려 시간의 노예가 되었다. “정밀한 시계를 가지면 시간을 손 안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은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은 관측자에 따라 시간이 달라질 수 있음을 밝혔다. 암스트롱의 재즈는 악보의 음을 길거나 짧게, 빠르거나 느리게 연주하며 음악의 아름다움을 창조하였다. 재즈를 듣는 청중의 마음속에서 시간은 시계처럼 흐르지 않았다. 우리는 느려지거나 빨라지는 시간을 경험하며 시간의 기준이 우리 자신임을 확인하였다.

사진기와 필름은 우리의 모습뿐만 아니라 문화적 편견을 찍었다. 1960년대 코닥사의 필름은 다양한 인종의 얼굴색을 표현하지 못했다. 학교 단체 사진에서 백인 아이들은 평소 모습대로 나왔지만 흑인 아이들은 검은 피부에 눈과 치아만 하얗게 나오고 얼굴의 특징이 사라졌다. 백인의 피부에 최적화된 필름의 화학성분 때문이었다. 코닥사나 폴라로이드사는 이러한 문제를 알면서도 무시했다. 필름을 개선하기보다는 즉석카메라에 얼굴을 밝게 하는 버튼을 추가해서 아프리카 국가에 판매하였다. 즉석카메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의 이동을 통제하는 신분증 발급에 이용되고 있었다.

이 책은 남아공에서 폴라로이드사를 철수시키는 ‘폴라로이드 혁명적 노동자운동’을 상세히 소개한다. “우리가 개발하는 기술은 무해하지 않으며, 항상 공공의 이익을 위해 쓰이는 것도 아니다. 기술은 사진필름이 그러했듯이 그 시대의 쟁점, 신념, 가치를 담아낸다.” 지은이는 기술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용기 내어 행동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정인경/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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