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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엄마가 내내 아픔이었던 이들에게 [책&생각]

등록 2023-02-03 05:00수정 2023-02-03 18:02

물 그림 엄마
한지혜 지음 l 민음사(2020)

엄마를 만나기 전, 몇 가지 주문을 외운다. ‘경고음이 울리면 숨을 고르자. 엄마를 낯선 타인처럼 대하자. 과거로 돌아가지 말자.’ 처음은 괜찮았다. 오랜만에 본 얼굴이 반가웠고, 그새 더 거칠어진 엄마의 손을 쓰다듬었다. 함께 사진도 찍고 자주 웃었다. 그렇게 잠들었다면 좋았을 걸, 기어이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내가 그때 너희 때문에 그 사람이랑 헤어진 거지. 좋은 사람이었어.” 짧은 한마디에 단단하게 고정한 버튼이 눌려버린다. “엄마,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잊었어? 그 사람이 새벽에 갑자기 집에 쳐들어와서 자고 있던 아빠도 때리고, 나한테 욕하고 위협했던 거. 그때 나 열일곱살이었어. 근데 좋은 사람이라고?” 전생처럼 흐릿한 과거가 생생하게 재생된다. 순식간에 나는 다섯살, 열살, 열다섯살 과거가 된다.

엄마가 사랑한 남자들, 엄마를 때린 남자들, 나와 동생을 위협한 남자들. 아빠를 비롯한 ‘그’들을 미워하느라 미워할 틈 없었던 엄마를 어느 순간부터 미워하게 되었다. 언제쯤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늦은 원망이라는 건 알았다. 내 증오는 힘이 약하다. 증오가 더 큰 걸 인정해버리면 당신을 이해할 마지막 사람마저 사라지게 될까 봐, 내게 남겨질 죄책감이 두려워서 나는 증오와 끈끈하게 붙은 이해와 사랑을 떼버리지 못한다.

한바탕 서로를 찌르다가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시간은 밤 12시. 몸을 들썩이다 잠들었다. 악몽을 꿨던 것 같다. 누군가 내 손을 잡는 게 느껴진다. 살짝 눈을 뜨니 어느새 엄마가 내 옆에서 손을 쓰다듬고 있다. 희미한 목소리가 들린다. “미안해, 승은아. 마음 아팠지? 미안해.” 나는 내 손을 잡은 그 손을 다시 잡은 채 잠든다. 새해 아침이 밝았다.

“엄마를 마음 편히 사랑하지 못했던, 엄마가 내내 아픔이었던 이들에게.” 오래전 읽은 문장이 절실해질 때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 책장을 뒤져 한지혜 작가의 단편소설집을 뽑았다. 심해처럼 파란 표지의 <물 그림 엄마>. 몇 년 전, 진하게 밑줄 그었던 부분을 살핀다.

첫 단편 ‘환생’에는 “우리를 키우는 동안에도 우리를 돌봐 주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돌봐야 하는 사람”이었던 엄마가 나온다. 죽음을 앞둔 엄마는 자꾸 환생하고 싶다고 말한다. 환생. 그 말을 ‘나’와 형제들은 건조하게 바라본다. 환생? 설마 우리랑 또 엮이려는 건 아니겠지? 애써 비웃으며 냉정하게 뿌리치려는데, 그녀의 외로웠던 삶이 물귀신처럼 마음에 달라붙는다. 평생 외로웠던 당신, 다음 생에는 마음 기댈 단단한 끈을 바라는 당신. 이기적인 당신. 그런 당신의 외로움을 이해해버린 나.

‘나’는 마지막 순간 엄마에게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만약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서로 “알아볼 수 없기를 바라”며, 처음처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며 짧은 인사를 건넨다. “안녕, 엄마.”

그 “안녕”은 작별 인사로도, 다음을 기약하는 여백으로도 읽힌다. 안녕. 우리는 언제 안녕이라고 인사하게 될까. 그 안녕은 어떤 의미가 될까. 예측해봤자 알 수 없다. 상처 입은 지난밤과 엄마의 웃음소리에 안심하는 아침. 뒤틀린 시공간 속에서 새해를 맞이한다. 작가가 찾은 ‘안녕’이란 작은 구멍으로 숨을 뱉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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