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책&생각] 없지만 있는 관계

등록 2023-03-03 05:00수정 2023-03-03 22:20

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돌봄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
더 케어 컬렉티브 지음, 정소영 옮김 l 니케북스(2021)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엄마가 술에 취해 자살 시도한 것 같으니, 얼른 엄마 집에 가보라는 문자였다. 마침 엄마 집과 가까운 경해에게 전화해 먼저 가달라고 부탁하고, 우주와 칼리와 함께 엄마 집으로 갔다. 널브러진 소주 두 병과 비어 있는 수면제 약통, 의식 없는 엄마. 경해는 119를 부른 뒤에 엄마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소방관은 엄마가 수면제를 얼마나 먹었는지 알 수 없으니 도착할 때까지 계속 깨우라고 했다. 우리는 각자 얼음과 젖은 수건을 가져와 엄마를 깨웠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도착하자 보호자 한 명만 동행 가능하다며 막는다. 나는 딸의 자격으로 응급실에서 엄마를 지켰다. 다른 세 사람은 병원 앞에서 대기했다. 정신이 든 엄마가 추워해서 입고 있던 외투와 슬리퍼를 건네고, 맨발과 민소매 차림으로 엄마를 부축해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경해와 우주가 근처에서 미리 사 온 삼선 슬리퍼를 내 발에 신겨주었고, 칼리가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나에게 입혀주었다. 그때 가피와 먼지와 히롱은 필요하면 연락하라며 대기하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혼자였다. 홀로 취한 엄마 곁을 지켰다. 가족 안에서 돌봄은 엄마와 내 역할이었으니까. 엄마의 알코올의존증이 심해지면서, 큰딸인 내 책임이 되었으니까. 도망치려고 해도 내가 없으면 큰일 난다는 두려움에 다시 주어진 자리로 돌아왔다. 지금은 다르다. 마을에 모인 다양한 얼굴들이 있다. 누군가 힘든 일을 겪을 때면 돈과 마음과 시간을 모아 함께 그 시간을 버틴다. 나는 공황장애 때문에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운데, 장거리 강연을 갈 때면 우주나 히롱, 경해, 먼지, 가피 등 운전 가능한 동료들이 이동을 돕는다.

서로를 살리는 이 생생한 관계에는 이름이 없다. 비혼을 지향하며, 모두 연애하는 사이도, 가족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이세요?”라는 질문 앞에서 “서로를 돌보는 사이요”라고 답하지만, 증명되지 않는 관계는 자주 문턱에 걸린다. 병원에서도 보호자 자격을 갖지 못하고, 가족을 중심으로 보장하는 제도에서도 밀려난다. 한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는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이 문장에 ‘아이’를 어떤 존재로 바꿔도 다 맞는 말이 된다. 함께일 때 돌봄은 짐이 아닌 기꺼운 책임이 된다.

“우리는 난잡하게 돌봐야 한다. 난잡한 돌봄은 가볍거나 진정성 없는 돌봄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난잡한 돌봄이 가장 가까운 관계부터 가장 먼 관계에 이르기까지 돌봄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증식해가는 윤리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더 케어 컬렉티브’에서 지은 책 <돌봄선언>은 이름 앞에서 방황하던 수많은 관계를 난잡한 돌봄이라는 단어로 품는다. ‘난잡함’이란 제도적으로 구획된 경계를 해체하며 증식해나가는 넓은 관계망을 의미한다. 연인도 가족도 아닌데 사회에서 기대하는 것보다 깊이 서로를 돌보는 관계. 이름은 없지만, 생생하게 있는 관계. 이 관계에 꼭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다. 다만, 고작 이름 때문에 치열한 돌봄의 릴레이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진 않기를 바란다. 정말 필요한 순간에 ‘자격’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문턱을 갉아버리고 싶다. 친밀감을 기준으로, 혹은 제도적 승인을 기준으로만 개개인의 돌봄 역량을 제한하지 않아야 하니까. 연약하기에 서로가 필요한 우리에게는 더 많은, 더 난잡한 서로가 필요하다.

집필노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교보문고에 ‘한강 책’ 반품하는 동네서점 “주문 안 받을 땐 언제고…” 1.

교보문고에 ‘한강 책’ 반품하는 동네서점 “주문 안 받을 땐 언제고…”

‘일용 엄니’ 김수미…“엄마, 미안해” 통곡 속에 영면하다 2.

‘일용 엄니’ 김수미…“엄마, 미안해” 통곡 속에 영면하다

감탄만 나오는 1000년 단풍길…2만그루 ‘꽃단풍’ 피우는 이곳 3.

감탄만 나오는 1000년 단풍길…2만그루 ‘꽃단풍’ 피우는 이곳

김수미가 그렸던 마지막…“헌화 뒤 웃을 수 있는 영정사진” 4.

김수미가 그렸던 마지막…“헌화 뒤 웃을 수 있는 영정사진”

‘일용 엄니’ 배우 김수미 별세…향년 75 5.

‘일용 엄니’ 배우 김수미 별세…향년 75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