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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팔랑이는 포스트잇에서 시작된, 누구도 허락한 적 없는 문장 [책&생각]

등록 2023-04-28 05:00수정 2023-04-28 10:32

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이 일어난 당시 수많은 시민들은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한 글을 포스트잇에 써서 붙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이 일어난 당시 수많은 시민들은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한 글을 포스트잇에 써서 붙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불확실한 삶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주디스 버틀러 지음, 양효실 옮김 l 경성대학교출판부(2008)

‘당신을, 당신의 죽음을 기억하겠습니다.’

노란 포스트잇에 연필로 글자를 눌러 적는다. 바람 부는 지하철역 입구에 멈춰서 가만히 눈을 감는다. 누군가의 흔적이 가득한 벽에 포스트잇을 붙인다. 포스트잇은 죽음을 가장 잘 팔리는 상품으로 취급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어떤 죽음 뒤에는 꼭 달라붙는 오래된 소문이 있다.

그러니까 남자 잘 만나야 해. 밤늦게 다니지 말고. (여/성살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나와야지. 그래야 저런 일 당하지 않는 거야. (산재사망) 불쌍하다. 대체 가족들은 뭐 했대? (고독사라고 이름 붙여진 소외사) 누군가 살아 있음을 ‘감사’하며, 말한다. “그만 생각하고, 시험 준비해. 출근 준비해야지. 돈 잘 모으고 있지?” “우리는 건강하게 오래 살자.” 불안과 두려움을 단단하게 단속하는 말과 빨리 잊으라는 재촉. 누군가의 죽음이 본보기로 전시되는 세상에서 내 애도는 방향 감각을 잃는다.

“누가 인간으로 간주되는가, 누구의 삶이 삶으로 간주되는가, 끝으로 무엇이 애도할 만한 삶으로 중요한가.”(46p)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나누는 말이 달라질 수 있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될까. 그의 죽음이 나에게 미친 영향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침묵이나 조언, 협박이 아닌 말들을 이어간다면 어떨까.

2016년 5월, 도심의 주점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이제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라고 불리는 일이다. 그날로부터 계절이 스무 번도 넘게 바뀌었다. 얼핏 익숙해 보이는 죽음 이후 다른 말이 흐르던 날들을 기억한다. 당시 미디어는 ‘묻지마 살인사건’이라고 몰아갔고 평소처럼 곳곳에서 몸단속하라는 협박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때는 달랐다.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시민들의 추모가 이어졌다. 발걸음. 휠체어 걸음. 이어지던 포스트잇의 행렬. 꾹꾹 눌러 적은 문장들.

‘피해자의 꿈을 물어봐 주세요.’

한동안 추모 현장의 포스트잇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외면하지 말자. 우리는 상대방 때문에 훼손된다. 그게 아니면 우리는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51p) 그날 이후 삶이 바뀌었다고, 전처럼 살 수 없다며 무엇이든 하고 싶다고 들썩이는 움직임들이 있었고 그중 나도 있었다. 살아남은 자의 책임을 생각한다. 세계가 외면한 죽음을 찾는 일은 ‘다른 말’을 찾는 일과 같았다. 길을 잃을 때마다 책을 읽었고, 집회에 나갔고, 문장을 남겼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누군가의 죽음이 살아가는 동안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죽음은 부재가 아니라 부재와의 관계라고 느꼈다.

어떤 글은 포스트잇에서 시작됐다. 누구도 허락한 적 없으나 직접 마련한 작은 지면, 언제든 떨어질 수 있는 연약한 접착력. 지나칠 수 없어서 멈춰 적고야 마는 순간. 포스트잇에 포스트잇이 겹친다. 당신의 죽음이 내 삶에 포개지고, 그 자리에 포개지는 여러 겹의 생이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지고, 나와 당신의 거리감이 사라지고, 세계를 향한 질문이 팔랑인다. 잊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 살아남은 자의 책임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포스트잇에서 시작한 끝나지 않는 애도의 문장이 있다. 살아 있는 시간만큼 주어진 얕은 숨을 닮은 문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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