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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숨고 싶은 우리에게 [책&생각]

등록 2023-05-26 05:01수정 2023-05-26 10:44

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런던 거리 헤매기
버지니아 울프 산문집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l 민음사(2019)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저는 자주 불안감과 무기력에 빠져요. 약 복용 4년 차, 나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마음은 여전히 수시로 밀려와요. 단어 하나, 말 한마디도 쓰고 뱉기 두려운 날에는 혼자 있어도 숨고 싶은 기분이에요. 저는 쓰는 노동을 하는데, 온종일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아요. 그런 날이면 유튜브 알고리즘을 따라가며 시간을 보내요. 멍한 눈빛으로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창밖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지켜봐요. ‘아, 오늘 하루도 이렇게 가는구나.’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집 <런던 거리 헤매기>에는 여성의 노동에 대한 고민이 기록되어 있어요.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내 경험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은 해결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그것을 해결한 여성이 있을지 의심스럽지요. 그녀를 가로막은 장애물은 아직도 막강한데ㅡ그것은 딱히 정의하기도 아주 어렵습니다. 겉으로 보면, 책을 쓰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 있을까요? 겉으로 보면,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큰 장애가 뭐가 있겠습니까? 속으로는, 사정이 매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그녀에게는 아직도 싸워야 할 유령과 극복해야 할 편견이 많이 있습니다. 실로 앞으로도 긴 시간이 지나야 여성은 글을 쓰려고 앉았을 때 죽여야 할 유령이나 맞부딪칠 바위를 보지 않게 되겠지요. 여성의 온갖 직업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문학에서도 이러하다면, 여러분이 이제 처음으로 시도하는 새로운 직업에서는 어떨까요?”

울프는 글 쓰는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자기가 겪는 어려움은 물질적인 부분 이전에 보이지 않는 ‘유령과 바위’에 맞서 ‘진실’을 쓰는 일이었다고 말해요. 글을 쓸 때, 자꾸 나를 의심하게 만드는 생각이 있지요. 이건 너무 사소한 이야기야. 이런 게 글이 될까. 형편없어. 위 문장에서 ‘글’을 ‘삶’으로 바꿔도 익숙해요. 나는 너무 사소한 존재야. 내 존재가 쓸모 있을까. 나는 형편없어. 여성과 소수자가 자신을 부정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유령과 바위는 곳곳에 있어요. 가끔은 그 유령이 내 모습을 하고 말을 걸기도 하죠.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비슷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고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늘을 응시하면서 자책하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글을 쓰는 지금은 평소와 다른 자세로 노트북 앞에 앉아 있어요. 제 편지를 받을 당신의 얼굴을 상상하느라 제 글이 부족한지 검열할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에요. ‘우리 사라지지 말자’라는 간절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수신자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니까요. 이 편지를 읽을 당신을 괴롭히는 일은 무엇일까? 힘들 때면 나처럼 자극적인 영상으로 도망칠까? 멍하니 창밖을 볼까? 웃을 땐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오늘 하루는 어땠을까?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동안 제 안의 유령과 바위가 잠시 사라졌어요. 버지니아 울프도 글을 쓰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의 진실을 쓰라’고 말했던 걸까요?

저는 유령에 맞서는 법은 모르겠어요. 아마 앞으로도 모를 가능성이 클 거예요. 다만 지금처럼 글을 쓸 수는 있겠죠. 당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힘든 게 아니라는 말,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말,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말, 그러니 사라지지 말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달라는 말, 사랑이 뭔지 질문하기 위해 우리가 계속 서로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말을 전달할 수는 있을 거예요.

홍승은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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