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무정한 세계
우리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과학사
정인경 지음 l 돌베개(2014)
과학책을 읽고 쓰면서 나는 과학을 ‘읽는’ 것에 대해 종종 고민한다. ‘과학’과 ‘책’은 어쩌면 참 안 어울리는 조합일지도 모른다. 과학을 전달하기에 책은 너무 느리고 길다. 논문 출판도 기다릴 수 없어 프리프린트(출판 전 논문)를 보는 곳이 과학계다. ‘문장’ 역시 과학을 전달하는 데 그다지 적합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문법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수학과 통계, 코드와 화학식은 더 빠르고 정확하게 과학을 전달한다. 그렇지만 과학자도 아닌 우리가 이 언어들을 모두 ‘마스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 과학자도 자기 영역 밖의 문법은 알기 어렵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과학을 읽어야 할까.
“똑같은 텍스트라도 누가 읽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다.” 정인경의 <뉴턴의 무정한 세계>가 나에게 남긴 문장이다. 이 책은 뉴턴, 다윈, 에디슨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성취로 인류가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쓴다. 그리고 이 책은 유럽의 눈부신 과학적 성취가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동아시아에 도달했을 때, 이곳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 과학을 읽었는지 쓴다. 역학과 진화론, 전자기학과 양자역학이 이광수의 <무정>,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그리고 이상의 ‘날개’와 얽히고설킨다. 이렇게 의도적인 교차지점들을 통해서 저자 정인경은 제국의 영국인과 식민지의 조선인은 같은 과학도 다르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정인경은 특히 과학이 계몽과 사회의 진보를 이뤄낼 것이라는 믿음, 즉 과학주의가 어떻게 식민지 조선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근대 과학은 신의 목적과 의도가 아니라,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자연이 움직인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탄생한, 때로는 잔인하고 비정한, ‘무정한 세계’의 법칙은 지구 어디에서나 적용된다고 믿어졌다. 과학주의는 계몽주의와 제국주의를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유럽인들은 과학으로 세계에 ‘문명의 빛’을 비추겠다며 제국을 건설했고, 일본인들은 아시아의 ‘위대한 과학제국’을 위시하며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다. 그래서 식민지 조선인들이 처음 마주한 서양 과학은 폭력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과학은 암울한 나라의 현실을 타개할 한 줄기 희망이기도 했다. 이광수는 <무정>을 통해 과학을 통한 계몽만이 조선인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라 힘주어 이야기했다. 김용관과 같은 조선의 1세대 과학기술자들은 발명학회와 과학강연을 조직해 ‘과학조선’을 건설하자고 외쳤다.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한 뒤 중국의 지식인들 역시 절박한 심정으로 서양 과학을 읽고 번역했다. 그 결과 사회진화론의 토대 위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이해되고 오역되었다.
출간 9주년이 되는 올해 <뉴턴의 무정한 세계>가 다시 출간된다고 한다. 그 사이 문해력이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어서, 슬프게도 글자 그대로 잘 이해하는 것이 우선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과학을 ‘읽는’ 일에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과학도 나름의 관점을 갖고 읽어야 더 깊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강연실 국립중앙과학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