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길남, 연결의 탄생
한국 인터넷의 개척자 전길남 이야기
구본권 지음 l 김영사(2022)
우리는 어떻게 숨쉬듯 인터넷을 사용하게 된 것일까? 1982년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전길남 박사와 서울대학교의 김종상 교수의 연구실 컴퓨터 사이에 우리나라 최초로, 그리고 세계에서 두번째로 ‘인터넷 프로토콜 패킷 통신’이 이뤄졌다. 이 책은 디지털 기술에 대해 오랫동안 글을 써 온 기자 구본권이 7년 간 전길남과 주변인들을 취재하고 인터뷰하여 쓴 것으로 한국 초창기 인터넷망 구축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전길남 박사는 재일동포 2세로 태어났다. 꽤나 부유하게 자란 소년은 ‘부모님의 나라’로 여겼던 곳에서 일어난 4·19혁명을 보고 고국으로 돌아가 보탬이 되자 마음먹었다. 오사카 대학과 미국 유시엘에이(UCLA)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통신 전문 기업인 콜린스 라디오, 미 항공우주국(NASA)의 제트추진연구소 등에서 일하며 실무 경험을 쌓았다. 1979년 한국 정부의 우수 해외 과학자 유치 정책에 따라 귀국해 한국전자기술연구소에서 컴퓨터 국산화 업무를 맡았고, 이후 카이스트로 자리를 옮겨 초기 정보통신 네트워크 개발의 주역들을 키워낸 시스템구조 연구실을 운영했다.
흔히 컴퓨터공학자로 소개되지만, 이 책은 전길남을 시스템공학자로 소개한다. 시스템공학은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른 통제를 통해 최적의 해결 방안을 찾는 분야”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전길남의 매우 계획적이고, 불확실성의 예측과 통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 해결 방식을 묘사하는 데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전길남의 엔지니어적 면모는 전문가의 사회 참여에 대한 문화인류학자이자 아내 조한혜정과의 의견 대립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한혜정은 여성주의 운동이나 환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전길남은 전문가의 사회 참여는 전문성이 있는 분야에 한정하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대체로 비정치적(apolitical)인 입장을 고수하려는 과학기술자의 특징과도 부합하는 부분이다. 한편 전길남은 자신이 전문성을 가진 인터넷 거버넌스 분야에서는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하여 지속가능한 인터넷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기술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여러 요소들을 함께 엮어낸다. 전화선과 같은 물질적 토대나, 기술 표준, 국제 협약 등이 그것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과학기술 인재를 유치하고, 기술의 국산화를 강조하며, 정보통신 기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정책적인 배경이다. 과학기술연구원(KIST) 연구원, 한국통신 부사장을 거쳐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이 된 경상현과의 일화들은 한국에서 인터넷 발전은 공학자 한 사람으로 전부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에는 구본권과 전길남이 디지털 기술의 미래와 과학자의 역할에 대해 나눈 이야기가 실려 있다. 카이스트의 연구실에서 부지런히 다른 나라와, 또 국내 기관들과 네트워크를 연결하고 관리하고 활용했던 전길남과 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그 당시 이러한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기 어려웠다고 이야기한다. 인터넷 기술의 발전 속도와 파급력은 당시 엔지니어들이 예측할 수 있었던 범위를 넘어섰다. 기술의 개발 과정에 있어서 사회과학자들의 역할이나 시민사회와의 소통은 기술을 적절히 통제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이 두 사람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또 다른 메시지이다.
강연실 국립중앙과학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