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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혐오학살극’ 간토대지진…‘삭제의 죄악’ 맞선 ‘기억의 복원’

등록 2023-08-25 05:01수정 2023-08-29 13:09

시인·문학평론가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 ‘백년 동안의 증언’
간토 대지진 두루마기 그림 속 조선인 학살 장면. 박명진 다큐멘터리 감독 제공
간토 대지진 두루마기 그림 속 조선인 학살 장면. 박명진 다큐멘터리 감독 제공

백년 동안의 증언

간토대지진, 혐오와 국가폭력

김응교 지음 l 책읽는고양이 l 1만7000원

꼭 100년 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요코하마 앞바다에서 발생한 진도 7.9의 강진이 수도 도쿄와 간토(관동) 지방 일대를 강타했다. 건물과 교량이 무너지고 시내 곳곳에 불길이 치솟았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다.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다.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탄다.” “조선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습격한다.”

이튿날 도쿄 전역이 불바다에 휩싸이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했다. 계엄령이 선포됐고, ‘조선인 폭동설’이 퍼졌다. 혐오와 공포의 광기가 전염병처럼 번졌다. 대형 자연재해는 순식간에 최악의 혐오폭력과 학살극으로 치달았다. 조선인 학살에 관한 언론 보도의 통제가 풀린 것은 지진 발생 50일이 지나서였다. 그해 12월 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1면에 “(조선인) 피살자 총합계 육천육백육십일(6661)인”이라는 소식을 전하며 ‘추모문’을 실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 정부는 사과는커녕 무시와 은폐에 급급하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가 간토대지진 100주기를 맞아 ‘백년 동안의 증언’을 새로 썼다. 단순히 ‘사건의 재구성’이 아니라 비극의 구조적 배경을 설명하고 “삭제의 죄악에 맞서 기억의 복원”에 방점을 찍었다. 1998년부터 꼬박 10년간 일본 와세다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중 일본의 지식인과 양심적 시민들의 헌신적 추념 활동과 일본 시민사회의 작지만 소중한 변화를 목격하고, 한인 디아스포라의 흔적과 현장을 찾아다닌 경험이 밑거름됐다.

책은 모두 5장으로 짜였다. 1장에선 지진과 학살의 주요 ‘사건’을 날짜와 시간순으로 간명하게 보여준다. 2장에는 일본 시인 쓰보이 시게지가 쓴 14연 204행의 장시 ‘15엔 50전’을 첫 우리말 번역으로 수록했다. 3장에서는 간토대지진을 다룬 한·일 양국의 작가와 영화인들의 ‘증언’을 전한다. 4장은 ‘진실’을 드러내고 피해자 치유와 가해자 책임을 촉구하는 일본 시민 모임들을 소개한다. 5장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의 ‘치유’ 방안을 살폈다.

대한민국 5년(1923년) 12월5일, 중국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면에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소식이 실렸다. 책읽는고양이 제공
대한민국 5년(1923년) 12월5일, 중국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면에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소식이 실렸다. 책읽는고양이 제공

2009년 일본의 양심적 시민들이 도쿄의 조선인 학살지 인근에 세운 추모비. 한자로 슬퍼할 ‘도(悼)’자가 새겨져 있다. 책읽는고양이 제공
2009년 일본의 양심적 시민들이 도쿄의 조선인 학살지 인근에 세운 추모비. 한자로 슬퍼할 ‘도(悼)’자가 새겨져 있다. 책읽는고양이 제공

특히 ‘15엔 50전’은 100년 전 당시 일본인이 광기 어린 사태를 영상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기록한 증언문학으로 가치가 높다.

“어디선가 조선인 한 무리가/ 철사로 줄줄이 묶여/ 시냇가 한가운데 처박혀 죽어간다는/ (…) 검을 꽂은 장총을 멘 병사가 차내를 검색하러 들어왔다/ 갑자기 내 곁에 쪼그리고 있는 시루시반텐을 입은 남자를 가리켜 소리질렀다./ -십오엔 오십전이라고 해봐!/ 그 남자는 군인의 질문이 너무도 갑작스러워/ 잠깐, 멍하게 있었지만/ 곧 확실한 일본어로 대답했다/ -쥬우고엔 고쥬센/ -좋아!/ (…) 아아, 그 젊은 시루시반텐이 조선인이었다면/ 그래서 “츄우코엔 코츄센”이라고 발음했더라면/ 그는 그곳에서 곧 끌어내려졌을 것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말을 빼앗기고/ 최후에 생명까지 빼앗긴 조선의 희생자여/ 나는 그 수를 셀 수가 없구나”

‘쥬우고엔 고쥬센’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일본의 지방 사람들도 ‘불령선인’으로 오인받아 목숨을 잃었다. 일종의 “집단적 광기의 오락”이었다. 학살의 최선봉은 민간인 자경단이었지만 “자경단 뒤에는 군대·경찰·헌병이 있었고, 그 뒤에는 일본 국가가 있었다.” 지은이는 일본 사회가 천황을 정점으로 한 삼각형 수직구조인 점에 주목한다. “이 종속적 구조를 따르지 않으면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된다. 20세기 전반 일본의 군국주의는 ‘교육 칙어’ 등을 통해 국가주의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강요했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게 지은이의 진단이다. 아베 신조가 집권했던 2012년 이후 일본은 “메이지 시대의 제국주의 영화를 꿈꾸는” 극우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다. 학계에선 일본의 민주주의를 ‘도금 민주주의’에 빗댄다. “껍데기가 도금됐고 알맹이는 중세형 계급사회”라는 뜻이다.

현재 한·일 양국 정부가 과거사를 대하는 태도는 통탄스럽다. “일본 정부가 변할 수 있을까? 이 말은 얼마나 공허한 기대인가. 어렵지만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아니 아예 0%라고 해도 일본 정치인들의 변화를 기대하고, 바른 말을 하는 정치인을 격려하고, 잘못된 판단을 세뇌시키려는 정치인은 비판해야 한다.” 지은이는 시민사회의 끈질긴 싸움과 연대, 올바른 기억의 보전에서 희망을 찾는다. “ 백년을 기억하는 것은 피해의식이나 자학적 태도가 아니다. 구원의 방법은 이미 과거에 있으며, 진정한 희망은 과거의 기억에서 나온다.”

지난해 9월1일 일본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일본 시민단체가 주최한 ‘간토대지진 99주기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서 김순자 한국전통예술연구원 대표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춤을 추고 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지난해 9월1일 일본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일본 시민단체가 주최한 ‘간토대지진 99주기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서 김순자 한국전통예술연구원 대표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춤을 추고 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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