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사회 최대의 문제는 토지 소유에 관한 것이었다. 농사짓는 대부분의 농민이 자기 소유의 토지가 없는 소작농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복잡하게 따질 수는 없지만, 소작농은 생산하는 곡식의 70~80%를 지주와 국가에 빼앗겼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다. 그중 가장 대담하고 이색적인 것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제안이었다.
다산은 농사짓는 사람만이 땅을 가질 수 있게 하고, 농사짓지 않는 사람은 땅을 가질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땅은 누구의 소유인가? 국가의 것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농민 개인의 것인가. 역시 아니다. 그는 땅은 ‘여(閭)’ 곧 ‘마을’의 공동소유여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마을에 일정한 규모의 농토가 있으면, 농토는 그 마을 전체의 것이다. 마을의 농지는 ‘여전(閭田)’이라 부르는데, 마을 사람 전체가 여전에 대한 모든 일을 공동으로 처리한다.
마을에서는 ‘여장(閭長)’을 한 명 뽑는다. 다산은 또 다른 논문 ‘탕론(湯論)’에서 모든 지도자는 아래에서 선출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여장은 따라서 당연히 마을 사람들이 선출하는 것이다. 여장은 선출직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면 끌어내리고 다시 다른 사람을 선출할 수 있다. 일단 여장을 선출하면, 마을의 농사는 여장의 명령을 따라 짓는다. 여장이 농사의 상황을 파악한 뒤 어떤 사람은 이곳 논에 일하게 하고, 어떤 사람은 저곳 밭에서 일하게 하면 그대로 따른다.
여장은 일을 분배한 뒤 개인들이 일한 시간을 장부에 기록한다. 가을이 되면 한 개인이 일한 총시간을 계산할 수 있다. 추수가 끝난 뒤 수확한 곡식을 한곳에 모으면 1년 동안 생산한 곡식의 총량(a)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일단 국가에 바치는 세금(b)과 여장의 봉급(c)을 제한 뒤 남은 것(d)을 분배한다.
장부에 기록된 모든 사람의 노동시간을 합하면, 총노동시간(e)을 얻을 수 있다. (e)로 (d)를 나누면 1시간당 생산한 곡물의 양(f)이 나온다. 내가 만약 1년에 1000시간을 일했다면, (f)×1000이 내가 얻을 수 있는 곡물의 양이 된다. 만약 이웃사람이 1500시간을 일했다면, 그는 나보다 50%를 더 갖게 될 것이다.
다산은 모두 7편에 이르는 ‘전론(田論)’에서 ‘여전제(閭田制)’를 기초로 하여, 그 위에 사회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다시 말해 토지의 공유, 노동량에 따른 분배 위에 사회가 놓이는 것이다. 토지의 사유를 철폐하고 공유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개인의 노동량에 따른 분배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다산은 한마디로 자생적 공산주의자다.
일각에서 홍범도 장군이 공산주자라면서 육군사관학교의 동상을 이전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서울 남산에 있는 공산주의자 다산의 동상도 옮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뿐인가. 교과서에서 다산에 대한 서술을 지우고, ‘여유당전서’도 광화문 광장에서 불태워야 할 것이다. 학생들이 다산을 통해 공산주의에 감염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다산을 찬양하면서 ‘여전론’을 주제로 논문을 쓴 사람도 찾아내어 처벌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 요즘 대한민국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강명관/인문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