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
카이 버드 외 지음, 최형섭 옮김 l 사이언스북스(2023)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자마자 원작을 읽어보기로 한 것은 라비의 발언 때문이었다. 그는 오펜하이머에게 대량살상 무기 만드는 것으로 물리학 300년의 정점을 찍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가만히 따져보니 파인만의 책에도 원폭실험이 끝난 후 모두 들떠 있을 때 한 과학자가 의기소침해 있었다는 내용이 떠올랐다. 확인해보니, 로버트 윌슨이었다. 대량살상 무기를 만들어놓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으리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핵무기 만드는 프로그램을 시작해야 한다고 처음으로 건의한 사레오 질라르드는 핵무기 사용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호리병에서 핵이라는 지니 요정이 나오면 어떤 비극이 펼쳐질지 알았던 과학자가 있었던 셈이다.
영화는 원폭 투하 이후 오펜하이머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원작에는 이 대목이 소상히 나오는데, 닐스 보어한테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힘주어 강조했다. 보어는 전쟁이 끝난 다음 미국과 소련이 경쟁적으로 핵 무장할 일을 염려했다. 이를 사전에 막으려면 맨해튼 프로젝트를 알리고, 이 무기가 소련을 위협하지 않을 거라며 안심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 조치가 훗날 원자력 에너지의 국제 통제에 관한 조기 합의를 이루는 결정적인 조건이 될 거라고도 이야기했다. 핵무기가 인류문명을 끝장내는 프랑켄슈타인이 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있었고, 이 폭탄의 물리적 원리는 소련에도 곧 알려져 상당히 빠른 속도로 개발되리라 내다보았다. 천재적인 과학자들은 다 알고 있었고, 멍청한 정치인들만이 이를 무시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오펜하이머는 원자력 에너지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독점하는 국제기구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그는 원자력 에너지 부문에서만이라도 각국이 주권을 부분적으로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례로 원자력개발공사를 세워 전 세계의 모든 우라늄 광산, 핵발전소, 연구소를 소유하게 하자고 했다. 무척 이상적인 제안이지만 영구평화론을 내세운 칸트나, 국가폭력을 국제기구에 증여하자는 가라타니 고진과 유사한 면이 있어 흥미롭다. 이런 제안이 무시되자 현실은 예측대로 되었다. 1950년대말 미국의 핵탄두는 1만8000기에 이르렀고 “이후 50년 동안, 미국은 7만기 이상의 핵무기를 만들게 되고 핵무기 프로그램에 5.5조 달러라는 엄청난 자금을 쏟아붓게 된다.” 오펜하이머가 핵 경쟁이 심해지자 미국과 소련을 일러 마치 유리병에 든 두 마리 전갈과 같은데, “서로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라고 말한 이유다.
분명히 오펜하이머의 몰락은 매카시즘이라는 시대 배경과 루이스 스트라우스의 복수심 탓인 면이 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오펜하이머가 핵이라는 지니 요정을 호리병에 가두려 애썼기 때문이다. 권력자는 손에 피가 묻었다는 오펜하이머를 울보 과학자라 조롱하며 오히려 그를 호리병에 가두어 내다버렸다. 아인슈타인, 보어, 하이젠베르크라는 영웅을 탄생시킨 300년 물리학의 결과가 원자폭탄이고, 그 지성의 힘이 권력에 종속되고 마는 역사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혹 인류지성의 타나토스적 충동이 아닐까 싶어 무척 씁쓸해졌다.
이권우/도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