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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평화를 잃고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책&생각]

등록 2023-12-01 05:01수정 2023-12-01 14:48

평화바람 20주년을 기념·기록한 2024년 달력의 뒤편 이미지. ‘오순택’은 평화바람 식구들의 성을 딴 노순택의 오마주다.
평화바람 20주년을 기념·기록한 2024년 달력의 뒤편 이미지. ‘오순택’은 평화바람 식구들의 성을 딴 노순택의 오마주다.

평화바람 20년을 기억하는 달력: 살아 있는 동안

노순택 글·사진 l https://bit.ly/평화바람달력신청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살고, 태어났으니까 살지만 단지 그것이 다일 리가 없다. 뭔가가 더 있지 않을까?이스라엘, 하마스의 짧은 휴전 첫날, 전쟁 종결이 아니라 휴전이라는 사실에 탄식을 하다가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가슴 뛰는 책을 발견했다. 책은 달력이다.

달력 앞 이미지. 붓글씨는 문정현 신부가 썼다.
달력 앞 이미지. 붓글씨는 문정현 신부가 썼다.

달력의 제목은 ‘살아 있는 동안’이다. 달력은 2003년 11월14일 이라크 파병 반대를 위해 출발한 유랑단 ‘평화바람’의 20주년 생일축하 선물로 평화바람의 친구들이 만들었다. 내 눈에는 동양의 간달프(흰 수염과 지팡이와 용기와 힘이 필요한 곳에 나타나는 능력)처럼 보이는 문정현 신부와 오두희, 중서, 오이, 딸기 등 식구들이 함께하는 평화바람은 2004년 평택 대추리, 2009년 용산, 2010년 제주 강정, 2014년 세월호, 수많은 평화가 절박한 곳에 유랑단 ‘꽃차’를 타고 달려가 그곳의 주민이 되어서 비통한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울고 웃기면서 아낌없이 몸과 시간을 썼다. 지난 20년간 평화바람 식구들에게는 평화를 온몸으로 원하는 것이 삶의 방식이었다.

이렇게만 평화바람을 소개하면 무척 아쉽다. 달력 뒤편에 있는 시 한 편을 인용해보겠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가 울고 있다/ 이유 없이 울고 있는 그이는/ 나로 인해 우는 것이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가 웃고 있다/ 한밤중에 이유 없이 웃는 그이는/ 나를 두고 웃는 것이다//…// 지금, 세상 어디에서 누군가 죽고 있다/ 이유 없이 죽어가는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엄숙한 시간’, 릴케)

죽어가는 사람이 죽음만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상상해도 좋을 것 같다.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평화, 어쩌면 연민으로 터질 지경이 된 얼굴. 어쩌면 아득히 긴 미래. 평화바람은 평화를 잃은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동안’ 잊을 수 없는 ‘인간’의 얼굴이 되어주었다.

평화바람 달력은 왜 ‘살아 있는 동안’이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을까? 10월의 어느 날 아침밥을 먹다가 나온 말이라고 한다. “살아 있는 동안에…” 그다음 이어질 말이 무척 궁금하다. “우리에게 아직 살아 움직일 힘이 있다면… 자, 살아봅시다. 살려봅시다.” 이 문장을 읽었을 때 가슴이 마구 뛰었다. 아직 살아 있다는 것, 한동안 더 건강하게 그럴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기쁜 일이다. 그 기쁨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마음속에 살리고 싶은 것, 지키고 싶은 것을 품고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삶은 완전히 다른 삶이다. 지금 평화바람이 살려내고 싶은 것은 전북 군산 하제마을의 6백살 된 팽나무다. 두 가지 사건이 팽나무를 비극의 목격자로 만들었다. 마을에 주한미군 폭격장이 생기면서 정부는 마을 토지를 강제 수용했다. 그리고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해수가 막히면서 마을의 주 수입원이었던 어항마저 폐쇄되었다. 주민들은 나무만 남기고 마을을 떠났다. 신공항 건설이 거론되는 새만금은 두 가지 문제가 겹쳐 있는 곳이다. 전쟁과 생태. 그러나 비극의 목격자인 팽나무가 희망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살려낼 수만 있다면 하제마을이 평화를 기원하는 곳이 될 수 있다. 전쟁의 땅을 원하면 전쟁의 땅에, 평화의 땅을 원하면 평화의 땅에 살 수 있다.

달력을 엮은 노순택 작가는 사진과 글로 사람들을 살아 숨쉬게 만들었다. 좋은 책은 우리를 외롭게 하지 않는다.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 거기 있게 한다. ‘살아 있는 동안’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내게 벌어진 일이 바로 그 일이다. 평화바람의 구호는 “신세는 한번, 평화는 영원하다”다. 내 신세보다 평화가 중요하다.

(이 달력의 판매수익은 85살 문정현 신부가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꽃차를 타고 ‘살아 있는 동안’ 평화 유랑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데 쓰인다.)

정혜윤 CBS(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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