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책&생각] 이별의 원칙은 이다지도 가혹하여 당신은 버둥대리라

등록 2023-12-22 05:00수정 2023-12-22 23:01

아폴론 저축은행
라이프 앤드 데스 단편집
차무진 지음 l 요다(2022)

올봄에 보는 산은 ‘보랏빛’이 아니다. 작년에는 눈을 가늘게 만들고 그렁그렁 바라보면 산 전체가 보라색 스펀지로 보일 정도였는데, 올해 산은 다르다. 초록색으로만 보인다. 소년은 그런 먼 산 풍경을 아쉬워하며 조망하다 눈을 돌려 주위를 둘러본다. 예불 중인 스님과, 스님 몰래 무릎걸음으로 법당을 돌아다니는 동생이 있다. 예불 시간을 견디는 소년의 마음은 제대로 당도하지 않은 봄에 대한 아쉬움으로 가득 차 있다. 소년의 눈에 비친 주변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소년의 마음속 그리움의 대상이 실은 보라색 진달래가 아니라 ‘엄마’임을 알게 된다. 4년 전 소년과 동생을 절에 데려다 놓고 가버린 엄마임을.

형제를 절에 맡긴 뒤 해마다 한 번씩 방문하던 엄마가 작년에는 오지 않았다. 올해 산에 진달래가 거의 피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설령 진달래가 많이 피었다 해도 소년의 성에는 차지 않았으리라. 세속에 있었다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동생은 아직 이별의 개념을 모른다. 하지만 동생보다 몇 살 위인 소년은 알고 있다. 이별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머무르고 있는 절간이, 예불을 드리는 무뚝뚝한 ‘산적 스님’이, 엄마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어린 동생이 원망스럽다.

세상에서 고립된 소년의 마음을 서정적인 풍경 묘사에 버무려 그윽하게 벼려내는 이 소설(수록 단편 ‘그 봄’)의 주된 정서는 그리움이다. 무엇을 보든, 누구와 말하든, 소년의 눈앞에는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어른거린다. 그리움을 통과하지 않고는 세상 무엇도 보지 못하는 극한의 상황이다. 십대의 나이에 갑자기, 아무런 준비 없이, 엄마와 떨어져야 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어린 날 부모와 이별하는 것은 다양한 이별의 형태 중 가장 쓰라리고 황망한 경우이다. 마음에 큰 상흔이 새겨지는, 살아가는 내내 그 상흔을 쓰다듬으며 살아가게 될 아픈 사건이다.

스님과 두 형제의 숨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은 정갈한 분위기의 소설은 어느 순간 극적인 반전을 맞는다. 그와 동시에 독자는 이별을 맞아야 했던 두 당사자 중 다른 한쪽의 시점으로 급격히 이동해간다. 그리고 알게 된다. 이별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얼마나 넓을 수 있는지. 이별이라는 사건의 힘은 무지막지해서, 나를 떠난 누군가의 내면에 들어가 역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며 그리워하게 만든다. 독자는 짧고 강렬하게 펼쳐지는 반전을 접하며 이를 깨닫고 전율하게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이별이 있다. 그중 그 어떤 이별도 다른 이별보다 수월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이별은 언제나,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다. 생살을 뜯어내는 듯한 통증과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우리는 한 번 마음에 담았던 사람을 잊지 못한다. 마음에 담고 다니며 끊임없이 소환해 그리워한다. 그러니 이별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강도 높은 극기훈련이라 하리라. 이 소설은 그 가혹한 사실을 아름다운 필치로 담담하게 전달한다. 전달 방법과 읽는 이의 마음에 이는 파동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독자는 방금 뇌리에 담긴 이야기를 소화하기 위해 한동안 버둥거리게 될 것이다.

정아은 작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친자 인정한 정우성…29일 청룡영화제 예정대로 참석 1.

친자 인정한 정우성…29일 청룡영화제 예정대로 참석

“어무이 부르면, 오이야 오이야…” 국어 교과서 실리는 할머니 시 2.

“어무이 부르면, 오이야 오이야…” 국어 교과서 실리는 할머니 시

네이버웹툰 ‘이세계 퐁퐁남’ 비공개 처리…“여성 혐오” 신고 누적에 3.

네이버웹툰 ‘이세계 퐁퐁남’ 비공개 처리…“여성 혐오” 신고 누적에

‘가왕’은 현재형…늦가을 밤 뜨겁게 달군 조용필의 명품 무대 4.

‘가왕’은 현재형…늦가을 밤 뜨겁게 달군 조용필의 명품 무대

로제 “세상에 인정받으려 애쓰는 모습에 지쳐…나를 찾으려 한다” 5.

로제 “세상에 인정받으려 애쓰는 모습에 지쳐…나를 찾으려 한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