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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세설] 여성, 한명숙, 그리고 총리/김정란

등록 2006-03-30 21:34수정 2006-03-31 16:44

우리가 한명숙 총리를 환영하는 이유는
개발되지 않은 여성적 가치의 담지자로서
남성들과 다른 장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를 새롭게 조직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세설

한명숙 열린우리당 의원이 총리직에 내정되었다. 앞으로 국회인준 절차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한 내정자는 무난히 임명될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 한나라당에서는 당적 이탈을 조건으로 한 내정자 총리 기용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여성의원들을 중심으로 여성 총리를 내기 위해서라면 당적 포기 조건을 수용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한 내정자가 당적을 이탈할 경우, 한나라당으로서는 한 내정자를 비토할 명분이 없다. 또 설사 당적을 이탈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성총리 임명이라는 큰 역사적 의미가 걸려 있는 만큼, 무조건적인 반대를 밀고 나가기는 힘들 것이다. 국민의 반응도 매우 우호적인 것으로 보인다. 한 내정자가 총리직에 임명되면,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탄생하게 된다. 여성의 입장에서 가슴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치적 정황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는 하지만, 한 내정자는 총리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한 총리는 부드럽고 온화한 인품으로 정평이 나 있는 만큼, 통합과 화합형 인물로서 제 역할을 해낼 것을 확신한다. 다만, 참여정부에서 그 동안 이해찬 전총리가 실질적인 분권형 총리로서 그 역량을 한껏 발휘해 왔었기 때문에, 과연 한 내정자가 이전총리에 버금가는 실무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총리 내정자는 김대중 정권 하에서는 최초의 여성부 장관으로서, 또 참여정부에서는 초대 환경부 장관으로서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행정가로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왔다. 실무형 총리로서도 능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한다.

여성이 정치의 장에 뛰어들어, 대부분 남성들로 이루어진 정치 조직 안에서 그 역량을 발휘한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남성이 하던 일을 여성이 한다는 의미 이상의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 남성과 똑같은 세계관과 정치적 태도를 가진 여성이 아무리 중요한 자리에 간다고 해도, 그것은 생물학적인 남성을 생물학적인 여성으로 바꾸어치기 했다는 의미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여성 정치인들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녀가 남성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와 사물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바탕하여 세계를 새롭게 조직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며, 그녀가 개발되지 않은 여성적 가치의 담지자로서, 남성들의 왜곡된 세계 운영 방식을 고쳐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만 여성일뿐, 사회적으로는 남성인 여성 정치인들을 우리는 수도 없이 보아 왔다. 독재를 합리화하고 미화하는가 하면, 사회의 약자를 무시하고 깔보고, 남성보다 더 저급하고 공격적인 언어로, 남성들보다 더 끔찍한 증오의 정치를 부추기는 여성 정치인들,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왜곡된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꿀 생각은 하지 않고, 수준 낮은 선동으로 그 왜곡된 정치 지형의 덕만 보려는 여성정치인들은 국민이 기다리는 여성정치인이 아니다.

한 내정자는 국민이 기다리는 여성정치인으로서 새로운 리더십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덕목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온화함은 내용없는 온화함이 아니다. 즉, 수동적 온화함이 아니라, 적극적 온화함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그 힘들던 독재시대에 온몸을 던져 항거했던 단호함을 지니고 있다. 세계가 아플 때, 그리고 그 아픔을 제공하는 명백한 원인 제공자가 있을 때, 그냥 이도 옳고, 저도 옳다, 무조건 다 받아들이자, 라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온화함이 아니다. 진정한 온화함은 세계를 아프게 하는 원인 제공자와 싸운다. 그것은 세계를 고치기 위해, 세계가 보다 합리적인 곳이 되게 하기 위해, 자신을 던진다. 아들을 때리는 폭력배와 타협하는 어머니는 진정으로 온화한 어머니가 아니다. 진정한 온화함은 온화함이 그 가치를 세계 안에서 실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과 싸운다. 한명숙 총리 내정자의 온화함은 그러한 온화함이라고 믿는다. 그녀는 개혁 문제에 관해 열린우리당 내 그 누구보다도 단호한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녀는 말로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실질적으로는 개혁에 반하는 행보를 보이는 열린우리당 내 일부 의원들과 다르다. 그들은 온화한 것이 아니라 흐리멍텅한 것이다. 온화함은 흐리멍텅함이 아니다.

나는 한 내정자가 당적을 이탈한다고 해도, 참여정부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지켜주기를 바란다. 이해찬 전총리는 참여정부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지켰다. 결국 그 단호한 태도로 말미암아 기득권 세력의 미움을 한몸에 받아 낙마하게 되기는 했지만, 나는 이해찬 전 총리가 총리로서의 역할을 매우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한 내정자가 그 페이스를 허물어뜨리지 말고 잘 이어가기를 바란다. 물론, 외적 양태는 바꿀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전총리가 유난히 언론과의 마찰이 심했던 것 등은 보기에 따라서는 비효율적 측면이 없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그 내용은 크게 잘못된 것이 없었다.
김정란/상지대 교수·시인
김정란/상지대 교수·시인
한 내정자가 혹여 거대언론의 공세에 시달려, 쉬운 타협적 제스추어를 취함으로써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을 훼손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전총리가 외강내강 형이었다면, 한 총리 내정자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하이에나같은 거대언론의 공격도 부드럽게 잘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길을 걸어왔다. 감옥에 가면서까지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젊고 지성적인 여성이 일국의 총리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어둠은 아직도 조금씩 빛을 갉아먹으며 악착같이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고, 비합리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지만, 그래도 우리는 어느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명숙 의원의 총리 내정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그녀가 숨겨진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여, 우리의 고질적인 저질 정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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