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서울시 재향군인회 주최 ‘독도 침탈기도 규탄시위’ 장면. 박종식 기자anaki@hani.co.kr
독도 마찰 일으켜 국민 결집시킨 뒤 헌법개정과 군사대국화 꿈꾸는 일본. 한-일 갈등은 공동책임의 문제가 아닌 식민지주의 청산을 회피한 일본쪽에 기본적으로 책임이 있다
안과 밖
3월 말부터 5월 초까지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우연히 한반도와 관련된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응을 경험하게 되었다. 일본인 납치 피해자인 요코다 메구미씨와 한국인 납치 피해자 김영남씨가 부부라는 사실이 디엔에이(DNA) 감정에 의해 확인되었다는 일본 정부쪽의 발표가 하나이고, 독도 근해에 조사선을 파견하려는 일본쪽의 움직임과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강경방침에 따른 한일 양국의 여론 악화가 두 번째 문제다.
납치문제에 대해서는 디엔에이 결과 발표가 김계관 북한 외무부 부상의 방일 시점에 맞추어진 점으로 보아, 납치문제를 국제사회에 여론화시키고 대북압박에 한국쪽의 여론을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명확히 엿보였다. 실제로 일본의 매스컴은 앞 다투어 한국쪽과의 연계 필요성을 강조했고, 한국쪽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와 함께 비난을 퍼붓는 논조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한일연계’의 필요성과 예측이 무성하던 시점에 ‘독도’문제가 다시 터졌다. 납치문제를 계기로 한일간의 연계 필요성이 일본내에서 여론화되고 있던 미묘한 시점이었던 만큼 일부에서는 납치문제를 계기로 불기 시작한 한일 연계의 움직임을 견제하려는 또 다른 정치세력의 ‘음모’라는 시각까지 등장했다. 결국 납치문제를 계기로 한미일 공조 하에 대북 압박을 여론화시키려는 시도는 일단은 독도문제로 인해 주춤거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것은 독도문제를 둘러싼 양 사회의 현격한 시각차인데, 이 시각차야말로 전후 한일관계의 ‘어긋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독도문제를 역사인식문제와 결부시켜 일본에 대해 강경 방침을 표명한 것은 답보상태에서 머물고 있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국내정치용’으로 보는 시각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물론 대일 외교가 과거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국내여론 호도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은 타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과거 어느 정권보다도 역사문제를 한일간의 현안문제와 분리해서 대응해왔다고 볼 수 있다.
독도 시각차 한-일 ‘어긋남’ 상징
예를 들면 2003년 1월16일, 일본의 가와구치 요리코 당시 외상과의 면담에서 노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를 미래의 한일관계 문제와 분리해서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표명했었고, 또한 독도문제로 인해 한일관계가 심각하게 경색된 작년 3월23일에도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노 정권의 대일외교의 기본축인 ‘조용한 외교’가 일본의 군사대국화와 과거사 문제를 분리해서 대응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백한 바 있다. 따라서 일각에서 제기되는 것처럼 노 정권이 대일외교를 과거사 문제와 결부시켜서 줄곧 ‘강성외교’를 펼쳐왔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과거사 문제와 한일간의 현안을 결합시킨 것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다. 일본은 특히 고이즈미 정권 등장 이후,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교과서 문제 등의 역사인식문제를 영토문제, 자위대의 외연 확대문제, 헌법개정 문제 등과 결부시켜왔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일본의 헌법개정 등을 비롯한 우경화 노선이 반드시 역사인식상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일본 정부의 일각에서는 1990년대 후반까지는 역사인식과 우경화 프로젝트를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분리방식이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과거에는 잘못했다. 그런데 헌법은 개정해서 자위대를 군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는 미일동맹의 강화라는 조건하에서 ‘일본의 군사적/외교적 재량권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며, 이는 민주당 등의 야당의 거부감을 희석시키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방식만으로는 헌법개정에 대한 국내외의 반발여론을 무마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영토문제나 역사인식문제를 통해 한국 및 중국과의 ‘마찰’을 부추김으로써 헌법개정에 필요한 정당 및 일본 국민의 ‘결집’을 꾀하고 헌법개정에 필요한 ‘여론 모으기’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독도문제는 역사인식상의 문제와 헌법개정 등의 군사대국화 문제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인 셈이다. 일본은 의도적으로 연결시켰을 것이고 한국 정부는 연결시킬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셈이다. 결국 독도 문제 등을 둘러싼 한일간의 ‘어긋남’은 기본적으로 ‘일본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한일간의 네 가지 현안(야스쿠니 문제, 독도문제, 교과서 문제, 헌법개정 등을 통한 군사대국화 문제)이 본질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문제’라고 해서, 대응방식도 하나라고는 볼 수 없다. <그림>은 네 가지 현안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도와 일본과의 연계 가능성을 개념화시킨 것이다. 교과서 문제는 한국과의 관련이 깊고 한일 양국의 관심도도 강하며, 따라서 한일 시민사회가 ‘보편적 원리’에 서서 ‘국경’을 넘어서 공동대응하기에 적절한 소재이지만, 독도문제는 일본 사회와의 연계가 아주 어려운 소재다. 이에 반해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는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일본과의 연계 가능성이 아주 큰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한국 사회의 관심도는 아주 낮다. 물론 이 네 가지 문제는 기본적으로 식민지주의의 미청산과 왜곡된 냉전구조의 산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각각의 문제들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원리가 있어 대응방식은 아주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독도문제에 대해 일본쪽은 주로 1952년에 한국쪽이 ‘군사점령’한데서 비롯된 것이며 이를 ‘원상복구’시켜야 한다고 한다. 결국 1972년의 ‘오키나와 반환’이나, 혹은 러시아가 현재도 ‘점유’하고 있는 쿠릴열도 네 개 섬과 같이 독도는 ‘잃어버린 영토’인 셈이다. 이와 같은 입장이 가장 원론적이고 강경한 입장이라 한다면, 이보다는 온건한 입장도 있는데,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 한일이 ‘공동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공동관리론’은 일본의 중도세력 뿐만 아니라, 유권자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본 공산당도 이를 지지한다. 전자의 강경한 입장은 결국은 독도문제를 방치해온 전후 일본 정권의 ‘눈치 외교’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력 증강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으로, 결국에는 헌법개정의 당위성으로 이어진다. 후자인 ‘공동관리론’은 독도문제를 기본적으로 양국 내셔널리즘의 충돌로만 본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한국쪽이 ‘독도문제’를 영토 및 주권 문제인 동시에 식민지주의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 대한 무지가 공통적으로 보인다. 결국 독도문제에 대해서는 일본내에 한국정부의 ‘우군’은 없는 셈이다.
도쿄재판 뒤 식민지배 책임 끝?
또한 야스쿠니 문제도 복잡한 성격을 지닌다. 야스쿠니 문제는 첫째는 정교분리 원칙의 문제이고, 둘째는 침략전쟁을 주도한 A급 전범 합사의 문제이고, 셋째는 조선, 대만 등의 식민지화와 관련된 문제이다. 첫째, 둘째 문제에 대해서는 야스쿠니 신사를 대신하는 비종교적 국립 추도시설의 건립이나 A급 전범 분사라는 형태로 해결책이 제시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해결책은 일본내나 미국의 반대 여론을 무마하는데는 효과적일 수 있으나, 셋째 문제인 식민지주의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A급 전범은 제2차 세계대전, 특히 진주만 습격 등을 주도한 책임자를 뜻하는 것일 뿐,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A급 전범을 처형한 도쿄 재판은 1930년대 이후의 중국침략과 ‘태평양 전쟁’을 대상으로 했을 뿐, 대만 및 조선 식민지 지배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미국쪽의 반발을 고려해서 만일 일본쪽이 A급 전범 분사화를 꾀한다 해도, 여전히 식민지 지배 책임문제는 남는 것이다.
결국은 한일관계의 ‘어긋남’의 원천은 식민지주의에 있는 셈이며, 그런 점에서 보면 ‘일본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한일간의 ‘갈등’을 내셔널리즘간의 대립만으로 보는 시각은 한일관계 속에서 아직도 살아 숨쉬는 식민지주의를 경시한 결과다.
예를 들면 2003년 1월16일, 일본의 가와구치 요리코 당시 외상과의 면담에서 노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를 미래의 한일관계 문제와 분리해서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표명했었고, 또한 독도문제로 인해 한일관계가 심각하게 경색된 작년 3월23일에도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노 정권의 대일외교의 기본축인 ‘조용한 외교’가 일본의 군사대국화와 과거사 문제를 분리해서 대응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백한 바 있다. 따라서 일각에서 제기되는 것처럼 노 정권이 대일외교를 과거사 문제와 결부시켜서 줄곧 ‘강성외교’를 펼쳐왔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과거사 문제와 한일간의 현안을 결합시킨 것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다. 일본은 특히 고이즈미 정권 등장 이후,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교과서 문제 등의 역사인식문제를 영토문제, 자위대의 외연 확대문제, 헌법개정 문제 등과 결부시켜왔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일본의 헌법개정 등을 비롯한 우경화 노선이 반드시 역사인식상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일본 정부의 일각에서는 1990년대 후반까지는 역사인식과 우경화 프로젝트를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분리방식이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과거에는 잘못했다. 그런데 헌법은 개정해서 자위대를 군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는 미일동맹의 강화라는 조건하에서 ‘일본의 군사적/외교적 재량권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며, 이는 민주당 등의 야당의 거부감을 희석시키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방식만으로는 헌법개정에 대한 국내외의 반발여론을 무마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영토문제나 역사인식문제를 통해 한국 및 중국과의 ‘마찰’을 부추김으로써 헌법개정에 필요한 정당 및 일본 국민의 ‘결집’을 꾀하고 헌법개정에 필요한 ‘여론 모으기’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독도문제는 역사인식상의 문제와 헌법개정 등의 군사대국화 문제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인 셈이다. 일본은 의도적으로 연결시켰을 것이고 한국 정부는 연결시킬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셈이다. 결국 독도 문제 등을 둘러싼 한일간의 ‘어긋남’은 기본적으로 ‘일본문제’인 것이다.
권혁태/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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