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자 스스로 상아탑 안주 대중과 소통 소홀하진 않았나”
지난 15일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117명 전원이 참여해 ‘인문학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어 26~27일 전국 인문대학장과 한국학술진흥재단은 ‘열림과 소통으로서의 인문학’을 주제로 ‘인문주간’ 첫 행사를 열고 인문학 위기와 관련된 선언과 인문대학장협의회 구성을 논의한다. ‘인문학 위기’의 아우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출구는 막막하나. 인문학 안과 밖에서 말하는 ‘인문학’에 대한 두 목소리를 싣는다.
▶ 밖에서 보니 /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경제학 박사)
다수의 소비자들이 특정 상품이나 서비스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은 궁극에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망함과 흥함이 마치 날줄과 씨줄로 연결되어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일상이다. 지금은 과거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경쟁의 범위가 확대되고 치열하다. 때문에 시장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거의 모두 위기에 처했다고 할 수 있다.
‘인문학 위기’를 말할 때 지원하는 학생 수가 줄어들어서 폐과를 해야 할 지경에 이른 대학들이 날로 늘어나고 마침내 수도권에 있는 대학들까지도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것은 위기임이 분명하다. 그런 위기란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기에 특별히 인문학의 위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
무차별 시장논리? 글쎄…
필자는 직접 책을 쓰기도 하고 동시에 많은 책을 읽기도 한다. 특히 즐겨 읽는 책에는 사학이나 철학, 심리학 그리고 인류학 등 인문학 관련서가 많다.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인문학적 지식과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늘 국내의 인문학 관련 분야에서 계신 분들이 대중들이 필요로 하는 인문학 지식을 제공하는 데 너무 소홀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오히려 대학과 같은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한 재야학자들에게서 꼭 필요로 하는 작품들을 만날 때가 많다. 인문학 관련 서적들이 대다수가 외국의 번역서임을 생각할 때 인문학 분야에 계신 분들이 학술 논문뿐만 아니라 대중과의 소통에 좀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고 느껴왔다.
훌륭한 가치·소양도 ‘고객’이 알아줘야
지적 인프라 구축 등 뜻있는 재단 지원 절실
물론 스스로 상아탑에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해 버린 채 그런 노력들에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심리학계의 걸출한 인물인 하버드대의 하워드 가드너 교수나 전 시카고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들의 작품을 볼 때마다 얼마든지 자신의 전문 지식을 이용해서 사회에 가치를 제공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본다. 왜 이런 노력들이 필요하고 중요한가. 스스로 자신의 가치 혹은 자기 분야의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시대를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치 있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소용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필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제대로 살아가는 데 인문학적 소양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다수의 사람들 특히 학생들을 채용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학자, 사업가, 배우 등 어떤 직업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입증할 수 있어야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시장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는데 실패하게 되면, 결국 고객들이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신들만의 높은 울타리를 세우고 세상의 요구와 필요에 관계없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교과목을 갖고 오랜 시간을 가르치다 보면 결국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이 최근 인문학의 위기 극복을 촉구한 선언문에는 “무차별적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으로 인문학의 존립 근거가 위협받고 있다" 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무분별한 시장논리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인문학적인 소양이란 것이 정말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일이라고 스스로 판단하면 인문학과를 선택하거나 인문학 관련 책들을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동시에 뜻있는 재단들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장래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인문학과 같은 지적 인프라 구축 작업을 지원하는 일이 있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한때 대우재단이 주도하였던 대우학술총서가 인문학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정말 컸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인문학 분야에 계신 분들이 소비자 중심의 사고를 갖고 좀 더 절박하게 소비자의 필요와 욕구를 파악하고 이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이 급선무라 생각한다. 누구든 타인에게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자들 역시 일련의 ‘지적기업가’라고 생각하고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대외의존성 못벗은 학문기반 자기혁신으로 체질 바꾸어야” ▶ 안에서 보니 / 최갑수 (서울대 교수·서양사학)
최근 인문학의 위기가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사실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그런 문제제기가 있어온 터라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인문학자들이 자기반성을 통해 결의를 다지고 또 그런 움직임이 대학가에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음은 자못 신선하고 긍정적이다.
우리의 인문학은 위기인가? 대학사회에만 국한해서 보면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다. 적지 않은 대학에서 인문계 학과의 통폐합 및 축소, 박사급 전문 연구인력의 생활고, 전망의 부재로 말미암아 학생들의 외면, 학문간의 부익부 빈익빈 추세 확대, 인문계 대학원의 공동화와 대학의 학원화 등의 현상이 그것이다.
하지만 위기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적어도 해방 이후의 반세기가 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해야 한다. 위기의 담론은 마치 이전에는 그런 것이 없었을 것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키지만, 1970년대 이전에는 위기를 운운할 만한 인문학이라는 것이 사실상 부재했다. 그러니까 1990년 이후에 위기의 담론이 제기된 것은 그나마 인문학이 하나의 분과학문체계로 자리잡았음을 방증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부분적으로는 실패가 아니라 성취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현재 인문학의 대부분의 분야는 1980년대 학번의 신진연구자들을 대거 확보하여 역사상 최대의 연구역량을 보이는 반면에, 이들이 제때 대학교수로 충원되지 못하는 현실은 위기를 넘어 가히 절망과 분노를 금치 못하게 한다.
아울러 인문학의 위기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성장을 반영한다. 신생독립국으로서는 드물게 ‘근대화’에 성공한 우리 사회는 그간 대학에 학문의 수입창구 구실을 부과하여 학문의 대외 종속성을 심화시키는 한편에, 그 종속성을 탈피하게 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갖추었다. 그런데 ‘근대성’이란 근대적 주체의 형성을 뜻하는 것이기에 궁극적으로 자생적인 학문 생산기반의 구축을 요청하게 마련이다. 해당 사회의 자기성찰, 자기통제, 자기확대 능력을 담보해 주는 관건이 독자적인 학문체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문학은 성격상 자연과학이나 공학과는 달리 양적 성장이 질적 도약을 보장하지 않는다. 국내박사가 교수충원의 주요한 통로의 하나가 된 이공계 분야와는 달리 인문학은 대외 의존성을 탈피하지 못했으며, 이것이 인문학의 존재이유를 크게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 성장과 동떨어져 인문학 존재이유 ‘흔들’
성찰적 연구환경 조성 국가의 역할 필요한 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인문학자들의 자기반성을 인문학의 자기혁신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우리 사회의 인문학에 대한 수요와 인문적 실천에 대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인문학자들은 전공분야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분과학문 체계라는 우물 안에 갇혀 인간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인간적 삶의 건강함과 균형감각을 끊임없이 복원시키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는지, 시대적 변화를 외면하고 오불관언하는 방관자적 자세를 견지하지나 않았는지, 학문적 보편주의라는 이름 아래 우리의 전통을 복원하여 과거를 현재화하는 데 게을렀던 것은 아닌지 깊이 되짚어봐야 한다. 과학까지 아우른 인간학을 따라서 인문학자들은 서로 소통하고 관류하여 학문의 상관성을 확보하고 인간의 삶에 직결되는 한 과학기술의 영역까지도 아우르는 광의의 인간학을 이룩해야 한다. 전자영상 매체의 등장에 따른 지식생산 방식과 주체화 양식의 변화를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이제껏 ‘죽은 과거’에 불과했던 우리의 전통을 되살려 우리의 현재와 화해시켜야 한다. 우리의 인문학이 우리의 전통을 고전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위기의 상황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어려울지도 모를 일이다. 국가나 정부의 역할이 필요한 것은 이 지점이다. 국가는 올바른 학문정책을 수립하여 인문학자들의 자기반성을 이끌고 또 그것이 열매를 맺도록 지원해야 한다. 연구과정 자체에 개입하기보다는 비판적 성찰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교육 및 연구기반의 조성에 매진해야 한다. 대학사회의 상업화를 조장하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은 폐지되거나 대폭 수정되어야 하며, 이번 기회에 국공립대학과 사립대학의 역할 분담이나 교사 충원제를 혁신하여 인문학과 중등교육의 연계성을 획기적으로 확보하는 방안 등을 진지하게 고려해봄직도 하다.
지적 인프라 구축 등 뜻있는 재단 지원 절실
물론 스스로 상아탑에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해 버린 채 그런 노력들에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심리학계의 걸출한 인물인 하버드대의 하워드 가드너 교수나 전 시카고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들의 작품을 볼 때마다 얼마든지 자신의 전문 지식을 이용해서 사회에 가치를 제공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본다. 왜 이런 노력들이 필요하고 중요한가. 스스로 자신의 가치 혹은 자기 분야의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시대를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치 있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소용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필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제대로 살아가는 데 인문학적 소양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다수의 사람들 특히 학생들을 채용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학자, 사업가, 배우 등 어떤 직업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입증할 수 있어야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시장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는데 실패하게 되면, 결국 고객들이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신들만의 높은 울타리를 세우고 세상의 요구와 필요에 관계없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교과목을 갖고 오랜 시간을 가르치다 보면 결국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이 최근 인문학의 위기 극복을 촉구한 선언문에는 “무차별적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으로 인문학의 존립 근거가 위협받고 있다" 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무분별한 시장논리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인문학적인 소양이란 것이 정말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일이라고 스스로 판단하면 인문학과를 선택하거나 인문학 관련 책들을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동시에 뜻있는 재단들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장래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인문학과 같은 지적 인프라 구축 작업을 지원하는 일이 있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한때 대우재단이 주도하였던 대우학술총서가 인문학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정말 컸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인문학 분야에 계신 분들이 소비자 중심의 사고를 갖고 좀 더 절박하게 소비자의 필요와 욕구를 파악하고 이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이 급선무라 생각한다. 누구든 타인에게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자들 역시 일련의 ‘지적기업가’라고 생각하고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대외의존성 못벗은 학문기반 자기혁신으로 체질 바꾸어야” ▶ 안에서 보니 / 최갑수 (서울대 교수·서양사학)
성찰적 연구환경 조성 국가의 역할 필요한 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인문학자들의 자기반성을 인문학의 자기혁신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우리 사회의 인문학에 대한 수요와 인문적 실천에 대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인문학자들은 전공분야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분과학문 체계라는 우물 안에 갇혀 인간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인간적 삶의 건강함과 균형감각을 끊임없이 복원시키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는지, 시대적 변화를 외면하고 오불관언하는 방관자적 자세를 견지하지나 않았는지, 학문적 보편주의라는 이름 아래 우리의 전통을 복원하여 과거를 현재화하는 데 게을렀던 것은 아닌지 깊이 되짚어봐야 한다. 과학까지 아우른 인간학을 따라서 인문학자들은 서로 소통하고 관류하여 학문의 상관성을 확보하고 인간의 삶에 직결되는 한 과학기술의 영역까지도 아우르는 광의의 인간학을 이룩해야 한다. 전자영상 매체의 등장에 따른 지식생산 방식과 주체화 양식의 변화를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이제껏 ‘죽은 과거’에 불과했던 우리의 전통을 되살려 우리의 현재와 화해시켜야 한다. 우리의 인문학이 우리의 전통을 고전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위기의 상황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어려울지도 모를 일이다. 국가나 정부의 역할이 필요한 것은 이 지점이다. 국가는 올바른 학문정책을 수립하여 인문학자들의 자기반성을 이끌고 또 그것이 열매를 맺도록 지원해야 한다. 연구과정 자체에 개입하기보다는 비판적 성찰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교육 및 연구기반의 조성에 매진해야 한다. 대학사회의 상업화를 조장하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은 폐지되거나 대폭 수정되어야 하며, 이번 기회에 국공립대학과 사립대학의 역할 분담이나 교사 충원제를 혁신하여 인문학과 중등교육의 연계성을 획기적으로 확보하는 방안 등을 진지하게 고려해봄직도 하다.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들이 지난 15일 “무차별적 시장 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 때문에 인문학의 존립 근거와 토대마저 위협받는 기로에 서 있다”며 인문학의 위기 극복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고려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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