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시인. 강창광 기자
4년만에 시집 ‘부끄러움 가득’ 낸 고은 시인
“나는 8·15이다//나는 6·25이다//나는 4·19이다//나는 5·18이다//나는 6·15이다//정지! 수하? 나는 밤새워 짓고땡이다 네가 붙인 번호이다”(〈수하(誰何)〉 전문)
고은(73) 시인이 신작 시집 〈부끄러움 가득〉(시학)을 내고 8일 낮 기자들과 만났다.
“시집 제목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는데, 나중에 교정을 보다 보니 문득 부끄러워져서 그 부끄러움 자체를 제목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부끄러움이란 소녀 같은 수줍음도 있고 수치심도 있겠지만, 무언가 본원적인 부끄러움 또는 세상에 대한 겸손함을 내포한 부끄러움일 수도 있겠지요.”
시집 제목은 수록된 작품 중 한 편의 제목이거나 시 본문의 한 구절에서 따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고은 시인의 새 시집에는 〈부끄러움 가득〉이라는 제목의 작품도 없고 그런 구절이 들어간 시도 없다. 다만 고려 말 문신 이색의 글귀 ‘羞滿面’(수만면)이 시집 제목 옆에 덧붙여져 있다.
지난 3월에 낸 대하 연작시 〈만인보〉 제21~23권을 제하면 〈부끄러움 가득〉은 2002년 12월의 〈늦은 노래〉 이후 만 4년 만에 나온 신작시집이다. 고은 시인 자신은 “새로 낸 시집은 언제나 처녀 시집”이라며 시집의 총수를 따로 헤아리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동석한 후배 시인 김기택씨는 서사시집 〈백두산〉 7권과 〈만인보〉 23권을 포함해 시집으로만 70여 권이 될 것이라고 계산했다.
“전쟁이나 기아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지식인들은 한참 뒤에나 그에 관한 담론을 발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어젯밤 텔레비전 뉴스에서 독거 노인이 사는 모습을 봤는데, 내가 언제 연탄 한 장 날라다줘 봤나 싶어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었어요. 빈부격차를 비롯해서 우리 사회의 문제는 산적한데 지식인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지독한 성찰을 하고 있는 참입니다.”
그런 고민의 반영인 듯, 새 시집에는 6·25 전쟁과 광주 5·18 같은 역사적 아픔, 한반도의 분단 현실과 세계 곳곳의 분쟁과 폭력 등에 관해 쓴 작품들이 많다. 200쪽짜리 두툼한 시집은 〈평화〉 연작 여덟 편과 그에 이어지는 길다란 시 〈평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지금 모든 신들이 죽어가고 있다/태어날 수 없는/모든 신들/거대한 주춧돌들 남은 채/더 이상/천상과 지상 사이/화관 쓴 선녀의 치맛자락 날지 못한다/신들 죽고/전쟁의 신만 살아 있다/전쟁의 아비와 자식만 살아 있다”(〈평화 이야기〉 부분)
고은 시인은 “우리 사회가 이해관계에 따라 지나치게 갈라져서 갈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에 갈등이 없다면 그건 곧 죽음이고 폐허일 것”이라며 “다만 갈등을 조화시킬 수 있는 중도가 크게 모자란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정현종 시인의 북한 핵실험 비판 시나 이문열씨의 연재소설 ‘호모 엑세쿠탄스’ 등이 정치적 논란을 낳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는 “시인과 작가가 자신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보고 다양한 견해를 표출하는 것은 좋다”고 말했다.
고은 시인은 지난해와 올해 연거푸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다가 쓴잔을 마신 바 있다. 그에게 노벨문학상에 관해 물었다.
“얼마 전 스웨덴에서 제 시집이 번역돼 나왔어요. 현지 신문에서 시집을 소개하면서 ‘내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며 물음표를 단 기사를 실었더군요. 숨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노벨문학상에 대해 제가 무어라 왈가왈부한다는 게 적절치 않지요.”
시인은 내년 봄쯤 1950년대 승려 시절 경험을 위주로 한 〈만인보〉 제24~26권을 내고 늦어도 내후년까지는 나머지 네 권을 더 내서 〈만인보〉를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만인보〉는) 빨리 잊어버려야지요. 다른 시들이 ‘나를 빨리 써 달라’며 아우성이에요. 이렇게 쓸 게 많으니 쉽게 안 죽을 것 같아요. 허허.”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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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민의 반영인 듯, 새 시집에는 6·25 전쟁과 광주 5·18 같은 역사적 아픔, 한반도의 분단 현실과 세계 곳곳의 분쟁과 폭력 등에 관해 쓴 작품들이 많다. 200쪽짜리 두툼한 시집은 〈평화〉 연작 여덟 편과 그에 이어지는 길다란 시 〈평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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