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억압받은 자아가 재생산하는 억압

등록 2007-06-08 19:36

김용석 / 영산대 교수
김용석 / 영산대 교수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아트 슈피겔만 〈쥐 I〉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8년에 태어난 아트 슈피겔만은 유대인 박해의 생생한 역사를 아버지에게서 듣게 된다. 그는 부친의 회고를 기록하고 자신이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함께 편집해서 유대인을 쥐로, 히틀러 치하의 독일인을 고양이로 묘사한 만화로 구성하는데, 그 결과가 〈쥐〉다. 만화 〈쥐〉는 1편과 2편으로 나뉘어 있는데, 출간 시기도 각각 1986년과 1991년으로 간격을 두고 있다. 슈피겔만이 만화 속에 등장해서 말하듯, “8년간의 작업 끝에 〈쥐〉 제1권이 발간되었고, 비평에 있어서나 판매에 있어서나 성공”이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로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유대인 탄압과 대학살에 관해서는 책과 영화로 수많은 작품들이 나와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이 특별히 주목받고 권위 있는 문학상까지 탄 이유는 무엇일까?

평론가들도 동의하듯이 만화라는 형식을 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슈피겔만도 이 점을 의식하고 있다. “만일 내 작품이 독자들에게 충격을 준다면, 그건 만화에 실릴 수 없다고 생각되던 내용이 실려 있기 때문일 거예요. 만화라는 장르가 포용할 수 없다고 간주되던 사고방식 말이에요. 그리고 독자를 즐겁게 만드는 재미있는 이야기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사실 역시 일종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거예요.”

그러나 이런 점들이 〈쥐〉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모두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이 작품의 소재나 형식보다는 서사 구조와 이야기의 내용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쥐〉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병행하고 있다. 그 하나는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이 아내와 함께 히틀러 치하의 유럽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술회하는 내용으로서, 끊임없이 삶을 짓누르는 공포와 죽음의 위협 그리고 인간의 수단화와 배신 등 일상적 시련과 고통으로 가득한 이야기이다. 다른 하나는 작가 슈피겔만이 부친과 대화를 나누면서 아버지의 삶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전하는 내용으로서,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의견 차이와 논쟁이 그와 아버지를 얼마나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운 관계로 몰고 가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아버지의 회고록’과 ‘아들의 자서전’이 함께 섞여 있는 이중적 구조는 이 만화를 보는 사람의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병치된 이야기가 품고 있는 특별한 의미이다.

아버지 블라덱은 진정시키기엔 너무나 고통스런 과거의 경험을 안고 있다. 소심하고 인색하기 짝이 없으며 극단의 이기성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그는 주위 사람들을 편치 않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학대하는 수준이다. 그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재혼한 부인 등은 그를 대할 때마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린다. 한마디로 그는 주위 사람에게 억압적인 인물이다. 블라덱의 이런 태도는 〈쥐 I〉의 부제(아버지가 피맺힌 역사를 이야기하다)처럼 피맺힌 과거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폭력의 경험은 또 다른 폭력을 낳고, 지독한 탄압을 겪은 사람이 남을 더욱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공동체의 역사와 개인적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다. 〈쥐〉는 탄압과 학살의 역사가 한 개인의 성격 형성과 행동에 어떻게 ‘사회·문화적 유전인자’로 작동하는지 고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유대인 탄압과 대학살에서 최후로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이자 어떤 식으로든 그 생존자를 넘어서 생존해 가는 자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작가 슈피겔만은 이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블라덱 슈피겔만이라는 사람 그 자체가 억압적인 인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 끌려가기 직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쥐 I〉은 이런 가능성을 보여 주는 일화들을 다루고 있다. 나치의 유대인 탄압이 있기 훨씬 전에 할아버지는 아들들을 군에 보내지 않으려고 잠을 재우지 않고 밥을 굶게 하는 등 억압적인 방법을 썼는데, 아버지는 이렇게 회상한다. “정말 끔찍했어!” 그러면서도 할아버지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아버지 블라덱도 남을 괴롭히면서 언제나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의 견고한 자아와 아집은 철옹성 같다. 그런 자아 자체가 타인들에게는 억압적이다. 작가는 이중적인 이야기 구조 안에서, 역사적 경험과 관계없이도 누구든 억압의 주체가 될 수 있고, 억압의 상황은 도처에 있으며, 억압의 기제는 예기치 않게 작동할 수 있다고 암시한다. 슈피겔만은 말한다. “어떻게 보면 아버진 늙은 구두쇠 유대인으로 인종차별적이기도 해요.” 더구나 아버지가 이기심 때문에, 자살한 어머니의 일기를 불태워버렸다는 말을 듣고는, “살인자!”라고 외친다. 그는 자신의 격한 행동을 곧 사과하지만 다시 한번 ‘살인자’라고 독백하며 아버지의 집을 나선다. 〈쥐 I〉은 ‘억압의 상흔’을 뒤로하고 쓸쓸히 걸어가는 작가의 뒷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김용석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