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 / 영산대 교수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마쓰모토 다이요의 ‘철콘 근크리트’
제임스 배리는 〈피터 팬〉을 창작하면서, 주인공의 캐릭터를 복합적으로 구성하는 데 신경을 썼다. 특히 피터에게 천진난만함 이상으로 사악한 심성을 세밀하게 심어 놓았다. 피터는 쾌활하고 천진하지만, 한편 매정하고 잔인하다. 극도로 이기적이고, 오만하기 짝이 없으며, 남을 괴롭히면서 즐거워하고, 소름 끼칠 정도로 냉소적이다.
항상 복수의 피가 들끓으며, 자신의 부하들에게는 냉혹한 폭군이다. 어른들에게 분노의 감정을 갖고 있는 피터는 자기 집에 혼자 있을 때, 의도적으로 일초에 약 다섯 번씩 짧고 빠르게 숨을 내뱉는다. 그가 살고 있는 네버랜드(Neverland)의 전설에 따르면, 아이가 숨을 한 번 내뱉을 때마다 어른이 한 명씩 죽기 때문이다. 네버랜드의 아이들은 일정한 수를 넘지 않아야 하는데, 피터는 수를 넘는 아이들을 가차없이 제거해버린다. 어떤 평론가는 피터의 이런 특성을 아이의 천진난만한 밝음에 견줘 ‘다크 사이드(dark side)’라고 했다. 어쨌든 ‘동심’의 향수로 치장되는 ‘아이의 신화’는 이미 손상을 입었다.
마쓰모토 다이요의 〈철콘 근크리트〉는 출판사 홍보 문구처럼 “신세기 통쾌 악동(惡童) 만화!”이다. 다카라초라는 도회지의 어느 동네에 일본어로 흑(黑)과 백(白)을 뜻하는 구로와 시로라는 두 아이가 살고 있다. 그들은 철근 막대기를 휘두르며 그곳을 “내 동네”라고 부른다. 구로와 시로는 건물 사이를 피터 팬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그들의 도약과 비행은 각진 업무용 건물들, 동글동글한 미래형 축조물들, 삐죽삐죽 솟아 있는 공사장의 철근과 콘크리트 그리고 각양각색의 골목길 풍경과 어우러져 환상의 세계를 형성한다. 누군가 독백한다. “이 다카라초란 거리는 분위기가 독특해. 동화 속의 나라라고나 할까?”
네버랜드에서 해적 두목 후크가 피터를 두려워하듯, 이 다카라초에는 폭력조직 두목도 두려워하는 꼬마가 있다. “도덕을 모르고 피 보는 걸 즐기는 꼬마가… 녀석의 이름은…구로!”이다. 그에게서는 이상할 정도로 사악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는 “이 거리 그 자체니까.” 더구나 구로는 “옛날부터 어른이라면 질색”했다. 반면 시로는, 그와 우정을 나누는 할아범이 말하듯, 참 특별하다. “이런 진흙탕 같은 거리에서 전혀 때묻지 않은 채 살고 있네. 거 참 모를 아이야.” 천진난만한 시로는 종종 우주와 통신을 하기도 한다. “여보째요. 여기는 지구별 시로 대원. 오늘도 이 거리의 평화는 제가 확실하게 지키겠습니다…시로 대원은 착한 아이입니다. 이상 오늘의 보고 끝!!”
구로와 시로는 다름 아닌 ‘도시의 피터 팬’인 것이다. 피터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둘이 나눠 갖고 있을 뿐이다. 피터 팬이 그러하듯이, 구로와 시로는 장소만 바뀌었을 뿐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이는 어른의 초상인가. 그럴지 모른다. 어릴 적 초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 처절한 삶의 투쟁 그 현장에 있는 어른의 초상이다.
인물이란 면에서 피터 팬과 구로-시로의 차이는 별로 없다. 그러나 장소의 차이는 무척 크다. 네버랜드는 결코 변하지 않는 세상이다. 하지만 다카라초는 세태에 따라 곧 바뀌어 갈 운명에 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물결은 곧 이곳을 개발하여 아이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어린이의 성’들로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작가 마쓰모토의 기본 주제가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구로와 시로는 피터보다 더욱 현실적으로 인간의 고뇌를 들추어낸다. 삶의 터전에 대한 상실감과 위기가 상존하기 때문이다.
구로와 시로는 다카라초를 사랑하며 그와 갈등한다. 동네에 대한 애정이 강할수록 상처도 깊어진다. 천진한 시로도 냉소한다. “킥킥킥…다 불타버리라 그래…시로는 이딴 동네 필요 없어.” 구로와 시로는 선함과 악함의 구분으로 살지 않는다. 순함과 독함의 구분으로 살아간다. 독하게 잔인함을 보이고 독하게 천진함을 지킬 뿐이다. 그러나 삶의 터전이 바뀌면 독하게 살아도 버겁다. 〈철콘 근크리트〉라는 제목은, 말이 서툰 어린 시절 작가가 ‘철근 콘크리트’를 잘못 발음한 데서 따왔다고 한다. 천진한 아이의 맛이 담겨 있다. 하지만 구로와 시로의 이야기는 언제든 상처를 줄 수 있는 도심의 엄연한 철근 콘크리트들 사이에서 전개된다. 이 모순의 조합 안에 그들이 드러내는 인간 조건이 있다. 만화 〈철콘 근크리트〉에 메시지는 없다. 의미를 전달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보여줌’이 있을 뿐이다. 교훈적 전달이 아니라, 존재의 드러냄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사람은 드러나는 것을 보고 성찰한다. 그것을 관조라고도 한다. 한때는 주로 자연이 드러내는 것을 관조했다. 인간 정신의 고귀한 빛을 관조하기도 했다. 오늘 우리는 대중문화의 통속한 서사와 풍경이 드러내는 것을 관조한다. 비열한 거리에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김용석 /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구로와 시로는 다카라초를 사랑하며 그와 갈등한다. 동네에 대한 애정이 강할수록 상처도 깊어진다. 천진한 시로도 냉소한다. “킥킥킥…다 불타버리라 그래…시로는 이딴 동네 필요 없어.” 구로와 시로는 선함과 악함의 구분으로 살지 않는다. 순함과 독함의 구분으로 살아간다. 독하게 잔인함을 보이고 독하게 천진함을 지킬 뿐이다. 그러나 삶의 터전이 바뀌면 독하게 살아도 버겁다. 〈철콘 근크리트〉라는 제목은, 말이 서툰 어린 시절 작가가 ‘철근 콘크리트’를 잘못 발음한 데서 따왔다고 한다. 천진한 아이의 맛이 담겨 있다. 하지만 구로와 시로의 이야기는 언제든 상처를 줄 수 있는 도심의 엄연한 철근 콘크리트들 사이에서 전개된다. 이 모순의 조합 안에 그들이 드러내는 인간 조건이 있다. 만화 〈철콘 근크리트〉에 메시지는 없다. 의미를 전달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보여줌’이 있을 뿐이다. 교훈적 전달이 아니라, 존재의 드러냄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사람은 드러나는 것을 보고 성찰한다. 그것을 관조라고도 한다. 한때는 주로 자연이 드러내는 것을 관조했다. 인간 정신의 고귀한 빛을 관조하기도 했다. 오늘 우리는 대중문화의 통속한 서사와 풍경이 드러내는 것을 관조한다. 비열한 거리에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김용석 /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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