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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로봇의 물음, 인간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등록 2007-04-29 17:08수정 2007-04-29 17:29

로봇 형사 게지히트의 인간적인 면모는 우리에게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br>그림: <플루토>  ⓒ2004~2006 우라사와 나오키, 스튜디오 너츠 / 나가사키 다카시 / 데즈카 프로덕션
로봇 형사 게지히트의 인간적인 면모는 우리에게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림: <플루토> ⓒ2004~2006 우라사와 나오키, 스튜디오 너츠 / 나가사키 다카시 / 데즈카 프로덕션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

철학자 칸트는 인간 이성이 갖는 모든 관심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물음에 집약된다고 했다.

첫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둘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셋째, 나는 무엇을 바라도 되는가? 만년에 이르러 칸트는 이에 네 번째 물음을 첨가했는데, 그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였다. 그는 앞의 세 질문들은 모두 네 번째 질문에 귀결된다고 했다.

일본 만화의 대가 테즈카 오사무도 평생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붙들고 작품 세계를 이루어 갔다. 그의 대표작 <철완 아톰>은 주인공이 로봇이고 로봇의 활약상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지만, 그것을 통해 작가는 지속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테즈카는 1951년에 아톰을 데뷔시켰고, 1964년에 <철완 아톰-지상 최대의 로봇>을 발표했다.

어린 시절부터 테즈카의 작품을 읽고 감동을 받았던 우라사와 나오키는 2003년 이 작품을 각색하여 자신의 그림체로 새로이 혼을 불어넣은 만화를 그렸는데, 그것이 <플루토>이다. 이런 점에서 테즈카-우라사와의 공동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는 <플루토> 역시 우리에게 인간성에 대한 진지한 물음들을 던진다.

우선 이 작품에 등장하는 로봇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기보다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가?’라는 우회적인 질문을 계속 던진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을 닮게 창조되었으며 인간과 어울린 삶 속에서 점점 더 인간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만화 속 대사처럼 “로봇은 인간과 똑같은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더욱 인간다운 감각을 업그레이드시킨다.”

<플루토>의 이야기는 로봇 형사 게지히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는 최고 수준의 인공지능과 전투 능력을 갖춘 로봇들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하나씩 파괴(또는 ‘살해’)되는 사건을 맡고 그 범인을 추적한다. 그 자신 뛰어난 인공지능뿐만 아니라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로봇인 게지히트는, 이러는 과정에서 자신의 인간적 면모 때문에 종종 깊은 생각에 빠진다.


우라사와의 그림체가 표현한 게지히트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옆집 아저씨의 외모이다. 여느 중년 남자처럼 앞머리가 꽤 벗겨진 모습, 직장과 관계된 아내의 질문에 퉁명스레 답하는 태도, 피로에 지친 얼굴 표정 등이 그렇다. 그를 정기 점검하던 호프만 박사도 고성능 로봇과 인간의 유사성을 이렇게 지적한다. “로봇은 지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네만. 이만큼 인간에 가까워지면 로봇이라도 지치게 되지.” 더 나아가 게지히트는 사람처럼 꿈을 꾼다. 그것도 끔찍한 악몽을….

‘아톰’ 각색해 새롭게 그려내
로봇살해범 쫓는 로봇형사 통해 넌지시 ‘타자 수용 가능성’ 물어

아톰은 테즈카의 손에 의해 탄생될 때부터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아톰은 머리와 가슴 그리고 온몸으로 인간 이상을 보여준다. 그 밖에도 아이들을 입양해서 키우는 로봇, 사랑의 추억을 두뇌 칩에 그대로 간직하려는 로봇 등이 드러내는 것은 인간성의 다양한 차원들이다.

<플루토>의 이야기가 제기하는 다음 번 물음은 “인간은 ‘비인간적 타자’를 수용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오래 전부터 인간이 아닌 타자를 수용해 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애완동물이다. 그러나 애완동물은 인간에게 위협적이지 않다. 아니, 인간은 그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데리고 산다. 그러나 인간은 로봇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한다.

로봇 과학자들은 인간이 자신을 닮은 피조물을 만들려는 것은 심리학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로봇이 인간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을 때 사람들이 로봇을 더 쉽게 수용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 모습이 아무리 인간을 닮았어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로봇을 경계하고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이 작품에도 로봇을 인간 사회에서 완전히 제거하려는 비밀 결사단체가 등장한다. 그들은 흰 두건을 쓰고 “로봇은 열등하다! 로봇은 노예다! 기계에게 죽음을!” 같은 구호를 외친다. 인간이 타자를 수용하는 태도는 아직 지독하게 인간중심적이다. 그러므로 결국 타자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명시적으로 제기하지 않지만, 인간성과 연관한 또 하나의 질문이 남아 있다. 그것은 ‘인간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즉 ‘인간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인류는 과학 기술의 발달과 함께 지난 2세기 동안 세상을 엄청나게 바꾸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과 닮은 존재를 본격적으로 창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자신을 진지하게 반성하고 바꾸는 데는 무척 인색했다. 그래서 아직 인류는 ‘인간중심주의’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인류가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타자가 필요하다. 그 타자는 적어도 인간만큼의 지적 능력을 갖춘 존재여야 한다. 아니, 인간보다 지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더 뛰어나다면 인간의 자기 반성과 근본적인 자기 변화를 일으키는 데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인간은 근원적인 자기 반성을 위해 탁월한 타자와 만나야 한다. 그러한 타자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바로 로봇이다. 모든 피조물에는 창조자가 의도하지 않은 탁월함이 창발할 가능성이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는 자신보다 뛰어난 자질과 능력의 타자가 등장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반겨야 할지 모른다. 그것이 결국에는 근원적인 자기 변화의 (어쩌면 유일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김용석 영산대 교수
김용석 영산대 교수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인간이 자신보다 뛰어난 타자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것은 근원적인 자기 변화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자신이 ‘만물의 영장’임을 자부하는 인간은, 생물학적이든 문화적이든, 자신이 ‘진화의 종점’에 와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진화의 열차는 출발역에서 이제 막 떠난 것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지, 마침내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또 무엇이 될 것인지, 그 물음에 대한 해답 찾기도 이제 막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영산대 교수 anemos@a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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