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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진실의 곡예’ 를 감상해 보시겠습니까?

등록 2007-04-22 17:54

슐츠는 <피너츠>에서 ‘인간 조건의 다양한 단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카툰은 좁은 공간과 짧은 시간 안에서 ‘진실의 곡예’를 보여주며, 이것이 만화의 구성이 갖는 소통의 힘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슐츠는 <피너츠>에서 ‘인간 조건의 다양한 단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카툰은 좁은 공간과 짧은 시간 안에서 ‘진실의 곡예’를 보여주며, 이것이 만화의 구성이 갖는 소통의 힘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찰스 슐츠의 <피너츠>

문예사에서 만화는 글과 그림이 결합한 획기적인 표현 양식의 탄생을 의미한다. 글과 그림의 결합은 문예의 연금술 같은 것이다. 이 연금술의 효과는 ‘보여주며 말하기’라는 강력하면서도 우월한 형태의 전달 매체를 탄생시켰다. 여기서 ‘말하기’란 물론 쓰여진 글의 전달 효과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만화의 탁월한 소통 구조는 어떤 사람이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을 ‘보면서’ 그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전달 효과를 가진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찰스 슐츠의 <피너츠(Peanuts)> 시리즈는 만화의 탁월한 소통 구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품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슐츠의 아이들이 읊고 있는 풍자시 속에 현대사회 어른들의 모든 실존적 고뇌가 담겨 있다”고 한다. 특히 비글(beagle)종인 개 스누피는 사회 부적응의 노이로제를 철학적 문제의 최종 변방으로까지 끌고 간다.

스누피는 자신이 개라는 것을 안다. 개도 개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다. 그는 어제도 개였고, 오늘도 개이며, 내일도 개로 남을 것이다. 그에게는, 신분 상승의 기회가 주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상향적 변신을 위한 어떤 보장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가끔 겸허의 극단적 처방을 시도한다. “우리 개들은 참으로 겸손하지…”라고 말하며 자기 위안의 한숨을 쉬는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보살핌과 배려를 약속하는 사람에게 살짝 달라붙는다.

만화=글+그림 획기적 표현양식
개 스누피 통해 인간 단면 보여줘
긴장 고조되다 ‘바람빼기’ 압권

에코에 따르면, 슐츠가 창조한 아이들은 인간적 비극과 인간적 희극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는 소우주를 이룬다. 특히 슐츠는 스누피 캐릭터를 통해 우리 시대 인간들이 겪는 나약함과 그것을 위장하고 극복하려는 전략들을 백과사전처럼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만화가 전하는 ‘진실’에 신뢰를 보내야 한다. 슐츠의 만화가 우리 삶을 각종 즉흥곡과 변주곡으로 비틀고 꾸민다고 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인간 조건의 다양한 단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이제 누군가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몇 칸 안 되는 카툰이 우리 삶의 진실을 보여줄까? 이 물음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바로 몇 칸 안 되기 때문에 그 좁은 공간과 짧은 시간 안에서 ‘진실의 곡예’를 보여준다고. 이것이 ‘하찮은’ 만화의 구성이 갖는 소통의 힘이다. <피너츠>에서 그 구성은 ‘긴장의 구조’와 ‘아포리즘(짧은 경구)의 빵때림’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슐츠는 <피너츠>에서 ‘인간 조건의 다양한 단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카툰은 좁은 공간과 짧은 시간 안에서 ‘진실의 곡예’를 보여주며, 이것이 만화의 구성이 갖는 소통의 힘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슐츠는 <피너츠>에서 ‘인간 조건의 다양한 단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카툰은 좁은 공간과 짧은 시간 안에서 ‘진실의 곡예’를 보여주며, 이것이 만화의 구성이 갖는 소통의 힘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슐츠 만화의 말풍선들은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첫째 칸, 둘째 칸, 셋째 칸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때마다 말풍선은 고도의 긴장으로 채워진다. 그러다가 마지막 칸의 말풍선에서 바람을 확 빼 버리는 아포리즘의 빵때림(또는 공기 빼기)으로 그 짧은, 하지만 매우 깊은 뜻의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찰리 브라운이 스누피를 몰아붙인다. “올해 널 먹이는 데 얼마나 들지 계산했는데 얼마나 나왔게?” “재산세가 오른 걸 아니?” “너한테 이 집을 1년 동안 제공하는 데 드는 비용을 모두 합했는데….” “그리고 말야, 여기 수의사 요금 청구서가 있어.” 찰리는 가 버리고 혼자 남은 스누피가 독백한다. “내가 쓸데없다는 걸 아는 건 쓸데없다니까!”

그런데 말풍선의 터질 듯한 긴장과는 달리, 찰리와 스누피의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다. 그들은 계속 거의 졸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마지막에 독백하는 스누피는 완전히 맥빠진 자세로 개집에 기대어 말을 내뱉는다. 글과 그림을 이용한 ‘조임’과 ‘풀림’의 이 절묘한 조화는 슐츠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 마지막 말을 듣고 나서야 앞의 말풍선들 속에 들어 있던, ‘쓸데없는’ 것 같던 말들의 의미가 이야기 전체에서 되살아나는 것을 감지한다.

이에 더해 슐츠는 스누피를 위해 좀 더 독창적인 방법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긴장 속에서 낮잠 자기’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스누피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모른 척 ‘오수’를 즐기며(사실은, 그러는 척하며) 자기 존재를 의식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수다쟁이 루시가 스누피를 몰아붙인다. “넌 삶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것 같아.”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수없이 많을텐데….” 루시가 사라진 다음 스누피는 개집 지붕 위에서 ‘하늘을 향해’(이 은유를 잘 보라! 보통 개는 엎드려 잔다) 독백한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개는 풀타임 직업이라고….”

스누피가 자신의 정체를 반어법으로 확인하는 혼잣말을 할 때 그는 사실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자세는 느긋하다. 자기를 압박하는 상황과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도 스누피는 전혀 쫓기지 않는 자세다. 짓궂은 사람에게 잔뜩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개집 지붕 모서리에 눕는다는 건 스누피에게 마지막 선택이다. 그렇게 한다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도 미끄러져 떨어질 위험으로 가득하다.

한 마디로 곡예인 것이다. 그러나 하늘을 향해 온 몸을 쭉 펴고 누워 있는 스누피는 천하태평의 모습이다. 그는 모든 것이 자신을 조여오는 상황에서도(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낮잠을 즐기는 존재로서 자신을 가장해야 한다. 이제 그가 기댈 곳은 자신을 이불처럼 덮고 있는 하늘뿐이다. 이 순간 그는 하늘에 운명을 맡긴 삶의 곡예사가 된다. 이런 고도의 가면술로서 스누피는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실은 매우 복잡한 삶의 단면을 보여주며, 독자에게 이렇게 청하고 있다. “지금 내가 부리고 있는 곡예 속에서 삶의 진실을 찾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진실은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운 것이다. 하물며 결코 단순하지 않은 현대 사회의 일상에서는 더 말해서 무엇하랴. 스누피는 우리가 아주 탁월한 곡예를 통해서만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은유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여 역시 탁월한 연기자로서 스누피는 이렇게 우리를 만화의 세계로 초대한다. “이곳에서 ‘진실의 곡예’를 감상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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