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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UCC도 못따라가는 신랄한 풍자

등록 2007-07-27 18:41수정 2007-07-27 18:58

<캐리커처로 본 여성 풍속사>
<캐리커처로 본 여성 풍속사>
남경태의 책 속 이슈 / <캐리커처로 본 여성 풍속사>
에두아르트 푹스 지음·전은경 옮김/미래M&B

파란색 사인펜 하나만으로 발레리나의 순간 동작을 멋지게 표현한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윤곽선도 없이 그저 가로 방향의 획만으로 빠르게 그려나간 작품이었다. 꽤 오래전에 본 것이고, 지금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조차 없지만 좀처럼 잊히지 않고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미술 양식으로는 크로키에 해당하는데, 펜 하나로 대상의 특징만을 포착하는 양식이라는 점에서는 캐리커처와 닮은 데가 있다.

<풍속의 역사>로 잘 알려진 에두아르트 푹스는 실은 캐리커처 전문가로, 캐리커처를 통해 19~20세기의 역사를 다룬 책을 여러 권 남겼다. 이 책은 여성에 관한 캐리커처를 테마로 삼고 있으나 여성을 다뤘다고 해서 편향적이지도 않고 캐리커처를 다뤘다고 해서 가볍지도 않다. 그렇잖아도 풍자를 생명으로 하는 캐리커처가 풍자에 능한 지은이의 손에서 발랄한 문화사로 빚어진 느낌이다.

풍자가 신랄한 유머라는 것은 시대가 달라져도 전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스칼렛 오하라처럼 하녀에게 코르셋을 최대한 조르라고 다그치는 부인 옆에서 남편이 말한다. “그러다간 내장이 다 으스러지겠군.” 부인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는 게 걸작이다. “내장 같은 건 아무도 못 보는데 어때요.” 매음굴에 포교하러 온 수녀를 보고 어린 창녀가 하는 말도 지독한 풍자다. “뭐 하러 먼 길을 에둘러오겠어요. 저나 수녀님이나 어차피 여기로 올 텐데.”

도미에나 비어즐리 같은 유명한 삽화가는 물론 고야나 툴루즈 로트레크 같은 화가들도 캐리커처를 즐겨 그렸다는 점에서 캐리커처 풍자가 당시 그림쟁이들에게 얼마나 큰 매력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지금은 펜 한 자루로 상큼한 크로키나 짓궂은 캐리커처를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학원은 강남에도 없다.

그 대신, 그림에 젬병이라 해도 캐리커처와 같은 풍자의 맛을 살리는 방법이 있다. 신문과 잡지가 첨단 매체였던 푹스의 시대에는 풍자가가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려면 직접 캐리커처를 그려 인쇄, 출판하는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인터넷 시대에는 부족한 손재주를 보완할 수도 있고 종이 매체를 통하지 않고 발표할 수도 있다. 요즘 유행하는 UCC가 그것이다.

남경태/번역가·저술가
남경태/번역가·저술가
유저가 직접 만드는 콘텐츠. 이 신개념의 매체를 이용하면 그림을 그릴 줄 몰라도, 또 신문과 잡지의 제한된 지면을 이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견해를 익명의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다. 전문가나 유명인이 아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풍자의 영역이 한껏 넓어진 셈이다.


다만 현재의 UCC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풍자의 정신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아직까지는 인터넷 유저들이 단지 콘텐츠를 만들고 발표하는 방식이 자유로워진 것에 도취해버린 느낌이 강하다. 어떤 건 유머가 없고 어떤 건 유머는 있으되 풍자의 촌철살인이 없다. 하지만 현재의 모든 것은 나중에 역사가 된다. 훗날 푹스 같은 사람이 휴대폰으로 찍은 ‘과거의’ 풍자적인 UCC 동영상들을 모아 ‘UCC로 본 21세기의 여성 풍속사’ 같은 훌륭한 역사서를 쓸지도 모를 일이다. 저술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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