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후예’ 번역·‘대군의 척후’ 펴낸 주익종씨
인터뷰 / ‘제국의 후예’ 번역·‘대군의 척후’ 펴낸 주익종씨
식민지근대화론 안병직·에커트 교수 제자로
‘해전사 재인식’ 필진이자 뉴라이트 활동가
경성방직 기록 분석 조선인 자본축적 살펴
“독립운동이 전부는 아니다…생산적 논의를” 냉전이 끝났을 때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승리는 필연인 듯 여겨졌고 모든 역사는 그 종점을 향해 달려온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땅에서 식민지근대화론과 뉴라이트가 힘을 얻기 시작한 것도 그런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역사는 정말 끝난 것일까? “1985년까지 안 선생님은 식민지반봉건사회론 입장이었는데, 85년부터 87년 초까지 일본에 다녀오신 뒤 싹 바뀌어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79학번’ 주익종씨는 ‘식민지반(半)봉건사회론’자였던 지도교수 안병직 교수가 어느날 ‘중진자본주의론’자로 돌변하자 처음엔 영문을 몰랐다고 한다. “일본에 가 보니 남북한 현실이 훨씬 더 분명하게 보였다. 일본에서 북한 쪽 사람들도 많이 만났는데 하나같이 한심했고, 북한 현실도 그랬다.” 안 교수는 제자들에게 그렇게 얘기했단다. 그 무렵 한국에선 ‘3저호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중진자본주의란 구미 자본주의를 선발자본주의, 그에 뒤이은 독일 일본 등의 자본주의를 후발자본주의로 나눈 다음 2차대전 뒤 자본주의 성장지역으로 새롭게 등장한 한국 대만 홍콩 등 옛 식민지를 따로 묶어 붙인 개념이다. 일본 교토대학 나카무라 사토루 교수 등이 주창한 중진자본주의론은 한국 등 옛 일본·영국 식민지들이 주변부자본주의론이나 종속이론 지지자들 주장과는 달리 급속한 자본주의 성장을 이뤘다며 그 동인을 식민지시기 종주국 주도로 이루어진 세계자본주의체제로의 편입에서 찾았다. ‘식민지근대화론’이 거기서 나왔고, 현실 정치지형과 맞물린 ‘뉴라이트’의 등장도 거기서 발원했다. 이는 식민지배체제를 봉건적 구조를 온존시킴으로써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저지하면서 수탈·착취를 영구화하는 체제로 파악하는 식민지반봉건사회론과는 전혀 다른 일제 식민지 성격 규정이었다.
2년여의 도쿄대학 연구교수 시절 나카무라, 호리 가즈오 등 사회경제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꾼 안 교수는, 귀국 뒤 ‘낙성대경제연구소’를 만들어 서울대 경제학과 제자들을 식민지근대화론자들로 육성했다. 자본주의 외부 이식론(외인론)에 입각해 식민지시대 공업화를 뒷받침하는 실증적 통계자료들을 동원한 이들은 식민지 수탈론, 조선사회 자본주의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 자율성장론 등을 주장해온 주류 민족주의 사학계와 정면충돌하면서 맹렬한 파열음을 냈다. 안 교수는 남북한 위상 역전과 신흥자본주의국들 발전이라는 ‘현실’을 통해 식민시대 ‘과거’를 재해석했다. 주익종씨에겐 그런 스승이 또 있었다. “에커트는 1970년대의 한국 자본주의 발달을 보고 그 기원을 식민지배에서 찾았으니 안 교수보다 더 빨랐던 셈이다.” 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교수. “에드워드 와그너, 제임스 팔레로 이어지는 미국 내 한국학 연구 패밀리의 적자” 에커트는 하버드 대학원생이던 1969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온 뒤 인생행로를 바꿨다. 2년 예정의 한국체류는 8년간 이어졌고 그때 그는 한국자본주의 ‘현실’의 역동성에 매혹당해, 그 뿌리가 어딘지 ‘과거’를 쫓기 시작했다.
안 교수의 생각을 흔들었던 1980년대에 그가 한국 현지실사를 거쳐 1991년에 내어놓은 책이 바로 <제국의 후예-고창 김씨가와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 기원 1876~1945>.
김성수·김연수, <동아일보>, 중앙중고, 고려대, 그리고 (주)경방(경성방직), (주)삼양사로 연결된 전북 고창 김씨 가문의 경성방직 성공사를 경방 내부문서 등 풍부한 자료들을 동원해 당시 시대배경과 함께 추적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의 자본주의적 변혁과 근대화를 촉진하고, 그 과정에 한국인이 적극 참여했으며, 현대 한국의 고도성장의 기원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이 책의 주장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미국 역사학회의 존 페어뱅크상을 받은 <제국의 후예>는 주씨의 지적대로 미국내 한국사연구 주류인 “광의의 식민지근대화론적 시각”을 지녔고, 그것이 부른 국내파장은 컸다. 판에 박힌 민족주의사관을 벗어나도록 했다는 찬사도 있었지만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미화했다는 비판이 거셌다. 하지만 “이 책은 한번도 제대로 번역된 적이 없었다.”
대학강사를 하다 하버드대 방문연구원으로 에커트와 함께 지냈고 지금은 서울신용평가정보(주) 신용평가 담당이사로 있으면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필진에도 참여하는 등 뉴라이트의 주요 활동가로 일하는 주씨가 <제국의 후예>를 이번에 처음으로 완역해 푸른역사에서 자신의 저서 <대군의 척후>와 함께 펴냈다. 척후는 정찰활동하는 스카웃(scout)을 가리키는데, 이 제목은 경성방직 등이 장래 조선인 기업들의 번성을 예고하는 척후와 같다고 한 춘원 이광수의 1935년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따왔다. “<대군의 척후>는 <제국의 후예>와 같은 주제를 다뤘지만 조선인의 자주적 대응, 주체역량 쪽을 좀더 살폈다.” 제국의 ‘사생아’라면 모를까 ‘후예’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다. “1919년 창립부터 26년까지 초창기 경방의 모든 거래내용을 기록한 일기장을 입수해 분석한 것도 새로운 점”이다.
에커트는 책 출간 17년 뒤 쓴 한국어판 서문에서 일제 강점기 중의 자본주의적 변혁의 힘을 지적한 것은 결코 “그것을 찬양하거나 칭송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일제 식민지배가 좋았다거나 옳았다는 게 아니라 가치중립적 입장에서 썼다는 주장이다. 주씨는 “독립운동만이 전부는 아니며 실력양성 쪽도 인정하자는 것”이라고 한 발 더 나갔다.
안병직과 에커트, 그리고 식민지근대화론, 심지어 그것을 비판하는 자본주의맹아론까지도 세계사를 자본주의 발달이라는 단선적 발전사관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하지만 냉전붕괴 뒤 10여년이 지난 지금 유일 초대국이 된 미국의 네오콘적 패권주의가 압박한 글로벌 신자유주의가 오히려 기울기 시작했다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중진자본주의론, 식민지근대화론 또한그 근본을 다시 되물을 때가 오지 않을까?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해전사 재인식’ 필진이자 뉴라이트 활동가
경성방직 기록 분석 조선인 자본축적 살펴
“독립운동이 전부는 아니다…생산적 논의를” 냉전이 끝났을 때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승리는 필연인 듯 여겨졌고 모든 역사는 그 종점을 향해 달려온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땅에서 식민지근대화론과 뉴라이트가 힘을 얻기 시작한 것도 그런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역사는 정말 끝난 것일까? “1985년까지 안 선생님은 식민지반봉건사회론 입장이었는데, 85년부터 87년 초까지 일본에 다녀오신 뒤 싹 바뀌어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79학번’ 주익종씨는 ‘식민지반(半)봉건사회론’자였던 지도교수 안병직 교수가 어느날 ‘중진자본주의론’자로 돌변하자 처음엔 영문을 몰랐다고 한다. “일본에 가 보니 남북한 현실이 훨씬 더 분명하게 보였다. 일본에서 북한 쪽 사람들도 많이 만났는데 하나같이 한심했고, 북한 현실도 그랬다.” 안 교수는 제자들에게 그렇게 얘기했단다. 그 무렵 한국에선 ‘3저호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중진자본주의란 구미 자본주의를 선발자본주의, 그에 뒤이은 독일 일본 등의 자본주의를 후발자본주의로 나눈 다음 2차대전 뒤 자본주의 성장지역으로 새롭게 등장한 한국 대만 홍콩 등 옛 식민지를 따로 묶어 붙인 개념이다. 일본 교토대학 나카무라 사토루 교수 등이 주창한 중진자본주의론은 한국 등 옛 일본·영국 식민지들이 주변부자본주의론이나 종속이론 지지자들 주장과는 달리 급속한 자본주의 성장을 이뤘다며 그 동인을 식민지시기 종주국 주도로 이루어진 세계자본주의체제로의 편입에서 찾았다. ‘식민지근대화론’이 거기서 나왔고, 현실 정치지형과 맞물린 ‘뉴라이트’의 등장도 거기서 발원했다. 이는 식민지배체제를 봉건적 구조를 온존시킴으로써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저지하면서 수탈·착취를 영구화하는 체제로 파악하는 식민지반봉건사회론과는 전혀 다른 일제 식민지 성격 규정이었다.
2년여의 도쿄대학 연구교수 시절 나카무라, 호리 가즈오 등 사회경제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꾼 안 교수는, 귀국 뒤 ‘낙성대경제연구소’를 만들어 서울대 경제학과 제자들을 식민지근대화론자들로 육성했다. 자본주의 외부 이식론(외인론)에 입각해 식민지시대 공업화를 뒷받침하는 실증적 통계자료들을 동원한 이들은 식민지 수탈론, 조선사회 자본주의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 자율성장론 등을 주장해온 주류 민족주의 사학계와 정면충돌하면서 맹렬한 파열음을 냈다. 안 교수는 남북한 위상 역전과 신흥자본주의국들 발전이라는 ‘현실’을 통해 식민시대 ‘과거’를 재해석했다. 주익종씨에겐 그런 스승이 또 있었다. “에커트는 1970년대의 한국 자본주의 발달을 보고 그 기원을 식민지배에서 찾았으니 안 교수보다 더 빨랐던 셈이다.” 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교수. “에드워드 와그너, 제임스 팔레로 이어지는 미국 내 한국학 연구 패밀리의 적자” 에커트는 하버드 대학원생이던 1969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온 뒤 인생행로를 바꿨다. 2년 예정의 한국체류는 8년간 이어졌고 그때 그는 한국자본주의 ‘현실’의 역동성에 매혹당해, 그 뿌리가 어딘지 ‘과거’를 쫓기 시작했다.
〈제국의 후예〉와 〈대군의 척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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