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포퓰리즘〉
서병훈 지음/책세상·1만2000원 개념 광범위한 ‘포퓰리즘’ 압축해 설명
‘인민 주권’ 내세우지만 권력 장악 수단 삼고
감성자극 단순정치로 민주주의 왜곡시켜 지난 수년 동안 한국정치 현상을 규정하는 용어로 가장 많이 동원된 것 가운데 하나가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었다. 주로 수구적 보수신문·보수정객들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공격할 때 들이댄 무기가 포퓰리즘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정말 포퓰리즘 정권이었나. 정치학자 서병훈 숭실대 교수가 쓴 〈포퓰리즘〉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욕설에 가깝께 사용된 포퓰리즘이란 말의 개념을 명료하게 한정하고 그 함의를 밝히려는 이론적 시도다. 그동안 국내에서 통용된 포퓰리즘이란 말은 ‘대중영합적 인기전술’을 뜻했다. 일종의 낙인찍기 효과를 노린 정치용어였다. 그러나 엄밀한 규정 없는 용어의 남용은 언어의 인플레이션 현상만 일으킨다. “언어의 오용이 심해지면 그 말의 값어치와 분석력이 떨어진다.” 포퓰리즘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말인 것은 사실이다. 인민주의·민중주의·대중주의로 번역될 수 있는가 하면, 인기주의·대중영합주의·인기영합주의로 옮길 수도 있다. 포퓰리즘은 이 모든 의미를 동시에 거느린 말이다. 그런 의미의 산포 때문에 학계에서는 포퓰리즘의 개념 규정을 포기하기도 한다. ‘포퓰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한 학문적 합의가 없다는 사실을 두고,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합의가 이루어졌을 뿐”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 책은 학문적 사정이 이렇다는 점을 전제하고서 포퓰리즘을 정의하는 일에 뛰어든다. 여기서 지은이가 채택하는 전략이 포퓰리즘의 개념적 범주를 최대한 압축하는 일이다. 지은이는 포퓰리즘의 핵심 요소로 ‘인민 주권의 회복 약속’과 ‘감성 자극적 단순 정치’를 제시한다. 인민이 역사의 주인이며 정치의 주체라고 선언하고 그 선언을 실현하겠다는 ‘인민주권론’은 고전적 포퓰리즘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흔히 ‘인민주의’로 번역되는 고전적 포퓰리즘은 19세기 러시아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이 시발점이며, 특히 19세기 말 흥성했던 미국 인민당 운동이 전형이다. 미국 인민당은 1892년 창당대회에서 이렇게 밝혔다. “현재 미국은 도덕적·정치적·경제적으로 파탄 상태에 직면해 있다. 선거는 부패했고, 도덕은 땅에 떨어졌다. 수백만 인민이 땀 흘려 거둔 수확을 극소수 부자가 챙겨가고 있다. 도시 노동자들은 자기 보호를 위한 권리를 박탈당했다. 우리 포퓰리스트(인민주의자)들은 민주주의의 뿌리를 재건함으로써 미국의 본디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지은이는 이 고전적 포퓰리즘을 현대의 포퓰리즘과 구별한다. 현대의 포퓰리즘은 ‘인민 주권 회복’이라는 약속을 고전적 포퓰리즘과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연결되지만, ‘감성 자극적 단순 정치’를 또다른 핵심 요소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 정치는 언제나 인민을 앞세우고 인민에게 호소한다. “포퓰리즘은 한마디로 인민에서 시작해 인민으로 끝난다. 인민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포퓰리즘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포퓰리즘의 역사가 인민에 대한 찬양, 그리고 인민이 배제되고 무시되는 정치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포퓰리즘은 ‘인민민주주의’와 공통점이 있지만, 그 공통점은 ‘인민 주권’을 앞세운다는 지점에서 그친다. 포퓰리즘은 인민주권을 말로만 앞세운다. 포퓰리즘의 또다른 요소는 ‘감성 자극적 선동정치’다. 포퓰리즘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정치운동이다. 카리스마를 지닌 선동정치가가 엘리트 집단, 특히 기성 정치권을 ‘인민’의 이름으로 공격하고 규탄하면서 그들을 쓸어버리고 인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열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포퓰리즘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장기적 변혁·개혁 과제를 제시하지 않고 즉각적이며 모순적인 약속을 남발하기 때문에 대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선동 정치에 머무른다. 지은이는 포퓰리즘은 대체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치운동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포퓰리즘 정치의 진정한 목표가 인민 주권 실현이 아니라 지도자의 권력 쟁취에 있기 때문이다. 권력을 획득하면 그 순간부터 지도자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존 제도권과 타협하고 거기에 굴복하게 된다. 포퓰리즘은 자기 원칙이 분명한 정치 프로그램이 아니다. 이 책은 현대 포퓰리즘 정치의 대표적 사례로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권,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 프랑스 극우파 르펜의 국민전선, 하이더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자유당,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정권 따위를 제시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인민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위축시킨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성적 토론, 합리적 사유, 건전한 상식을 위협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자양분을 얻지만 결국엔 민주주의 위기를 심화한다. 그렇다면, 국내 보수파들의 주장대로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포퓰리즘 정부였나. 지은이는 두 정부, 특히 노무현 정부가 일부 포퓰리즘적 성격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포퓰리즘 정부로 규정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인민 주권을 내세워 선동 정치를 편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서병훈 지음/책세상·1만2000원 개념 광범위한 ‘포퓰리즘’ 압축해 설명
‘인민 주권’ 내세우지만 권력 장악 수단 삼고
감성자극 단순정치로 민주주의 왜곡시켜 지난 수년 동안 한국정치 현상을 규정하는 용어로 가장 많이 동원된 것 가운데 하나가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었다. 주로 수구적 보수신문·보수정객들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공격할 때 들이댄 무기가 포퓰리즘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정말 포퓰리즘 정권이었나. 정치학자 서병훈 숭실대 교수가 쓴 〈포퓰리즘〉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욕설에 가깝께 사용된 포퓰리즘이란 말의 개념을 명료하게 한정하고 그 함의를 밝히려는 이론적 시도다. 그동안 국내에서 통용된 포퓰리즘이란 말은 ‘대중영합적 인기전술’을 뜻했다. 일종의 낙인찍기 효과를 노린 정치용어였다. 그러나 엄밀한 규정 없는 용어의 남용은 언어의 인플레이션 현상만 일으킨다. “언어의 오용이 심해지면 그 말의 값어치와 분석력이 떨어진다.” 포퓰리즘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말인 것은 사실이다. 인민주의·민중주의·대중주의로 번역될 수 있는가 하면, 인기주의·대중영합주의·인기영합주의로 옮길 수도 있다. 포퓰리즘은 이 모든 의미를 동시에 거느린 말이다. 그런 의미의 산포 때문에 학계에서는 포퓰리즘의 개념 규정을 포기하기도 한다. ‘포퓰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한 학문적 합의가 없다는 사실을 두고,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합의가 이루어졌을 뿐”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 책은 학문적 사정이 이렇다는 점을 전제하고서 포퓰리즘을 정의하는 일에 뛰어든다. 여기서 지은이가 채택하는 전략이 포퓰리즘의 개념적 범주를 최대한 압축하는 일이다. 지은이는 포퓰리즘의 핵심 요소로 ‘인민 주권의 회복 약속’과 ‘감성 자극적 단순 정치’를 제시한다. 인민이 역사의 주인이며 정치의 주체라고 선언하고 그 선언을 실현하겠다는 ‘인민주권론’은 고전적 포퓰리즘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흔히 ‘인민주의’로 번역되는 고전적 포퓰리즘은 19세기 러시아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이 시발점이며, 특히 19세기 말 흥성했던 미국 인민당 운동이 전형이다. 미국 인민당은 1892년 창당대회에서 이렇게 밝혔다. “현재 미국은 도덕적·정치적·경제적으로 파탄 상태에 직면해 있다. 선거는 부패했고, 도덕은 땅에 떨어졌다. 수백만 인민이 땀 흘려 거둔 수확을 극소수 부자가 챙겨가고 있다. 도시 노동자들은 자기 보호를 위한 권리를 박탈당했다. 우리 포퓰리스트(인민주의자)들은 민주주의의 뿌리를 재건함으로써 미국의 본디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20세기 중반 아르헨티나를 이끌었던 후안 페론 대통령의 부인 에바 페론. 당시 수많은 노동자·민중이 에비타(에바의 애칭)를 따랐다. 지은이는 페론주의를 포퓰리즘의 전형 가운데 하나로 거론한다.〈한겨레〉 자료사진
포퓰리즘 정치는 언제나 인민을 앞세우고 인민에게 호소한다. “포퓰리즘은 한마디로 인민에서 시작해 인민으로 끝난다. 인민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포퓰리즘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포퓰리즘의 역사가 인민에 대한 찬양, 그리고 인민이 배제되고 무시되는 정치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포퓰리즘은 ‘인민민주주의’와 공통점이 있지만, 그 공통점은 ‘인민 주권’을 앞세운다는 지점에서 그친다. 포퓰리즘은 인민주권을 말로만 앞세운다. 포퓰리즘의 또다른 요소는 ‘감성 자극적 선동정치’다. 포퓰리즘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정치운동이다. 카리스마를 지닌 선동정치가가 엘리트 집단, 특히 기성 정치권을 ‘인민’의 이름으로 공격하고 규탄하면서 그들을 쓸어버리고 인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열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포퓰리즘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장기적 변혁·개혁 과제를 제시하지 않고 즉각적이며 모순적인 약속을 남발하기 때문에 대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선동 정치에 머무른다. 지은이는 포퓰리즘은 대체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치운동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포퓰리즘 정치의 진정한 목표가 인민 주권 실현이 아니라 지도자의 권력 쟁취에 있기 때문이다. 권력을 획득하면 그 순간부터 지도자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존 제도권과 타협하고 거기에 굴복하게 된다. 포퓰리즘은 자기 원칙이 분명한 정치 프로그램이 아니다. 이 책은 현대 포퓰리즘 정치의 대표적 사례로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권,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 프랑스 극우파 르펜의 국민전선, 하이더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자유당,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정권 따위를 제시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인민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위축시킨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성적 토론, 합리적 사유, 건전한 상식을 위협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자양분을 얻지만 결국엔 민주주의 위기를 심화한다. 그렇다면, 국내 보수파들의 주장대로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포퓰리즘 정부였나. 지은이는 두 정부, 특히 노무현 정부가 일부 포퓰리즘적 성격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포퓰리즘 정부로 규정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인민 주권을 내세워 선동 정치를 편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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