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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인문학 부활 실천 씨뿌린 독서대학

등록 2008-03-14 19:43

한기호의 출판전망대
한기호의 출판전망대
한기호의 출판전망대 /

중학교 2학년인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너무나 예쁜 국어 선생님께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었다. 마침 국어 선생님은 각자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 읽고 ‘등장인물’이 일으킨 ‘사건’을 적은 다음 자신의 ‘생각’을 각기 세모 네모 동그라미 안에 써오는 숙제를 내주었다. 아이는 선생님께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에 선생님이 만류하는데도 좀 어려운 책을 골랐다. 무리한 책 선택으로 말미암아 아이는 정말 힘겹게 그 숙제를 해야 했다. 그러나 덕분에 책 읽는 능력이 일취월장한 아이는 책 읽기에 부담을 갖지 않게 되었다. 출판사에서 인문서 편집자로 일하는 엄마를 위해 책을 모니터해주면서 엄마와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지금 새 정권은 성적으로 줄 세우는 엘리트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 게다가 영어 몰입교육까지. 하지만 지금 아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책을 제대로 읽는 능력이 아닐까? 나는 지난 7일에 있었던 한 학교 개교식에 참석했다가 우리 교육의 유일한 희망이 아이들의 책 읽기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그 학교는 독서대학 르네21.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성프란시스대학의 주먹밥시민강좌로 인문학 독서의 힘을 진작 깨달은 대한성공회가 출판단체인 한국출판인회의와 손잡고 문을 연 학교다.

신자유주의가 나은 뼈아픈 결과물이 노숙자다. 르네21 개교에 공이 많은 한 신부는 노숙자들이 인문학 강의를 듣고 인간의 주체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체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을 보고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공동 명예학장인 대한성공회 박경조 대주교는 개교사에서 “산업문명과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달은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안겨주었지만 인간 자체뿐만 아니라 자연과 환경을 심각할 정도로 파괴시키고 있다. 그런 현실에서 인간의 잘못된 욕망의 수레바퀴를 멈출 가장 확실한 대안은 성찰적 책읽기다. 르네21은 그런 일에 작은 대안의 씨앗 하나를 심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개교에 즈음해 개설한 인문교양, 동양고전, 서양고전 등 세 수요 인문과정은 모집을 시작하자마자 곧 30명 인원이 마감되는 바람에 행복한 항의를 적지 않게 받았다고 한다. 또 100명 정원의 금요 대중강좌 ‘주제별로 만나는 책 세상’도 정원 걱정이 없을 만큼 인기를 끌었는데 수강신청자는 20대부터 60대까지 골고루 퍼져 있다고 한다. 르네21은 올해 하반기부터 청소년을 위한 ‘푸른 독서학교’를 여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몇 해 학계에서는 인문학을 살리자는 학자들의 성명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실천적인 움직임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성명의 목적이 주로 국가의 경제적 지원을 이끌어내고 학과 지망생이 줄어들어 위태로워진 자기 밥그릇을 유지하는 데 있다 보니 나타난 자연스런 결과였다.


인문학은 르네21 같은 실천적 노력이 모든 대학, 나아가 모든 중·고등학교로 퍼져나갈 때 저절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개인의 품격과 국가의 품격을 동시에 살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돈’과 ‘부동산’으로 점철된 물질적 천박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평등교육의 요체인 학교 도서관을 제대로 세우는 일도 물론 꼭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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