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마의 부엌으로 초대합니다〉
혼란서 수작 내놓는 예술가도 있어
“완벽주의가 되레 완벽의 꿈을 죽여”
“완벽주의가 되레 완벽의 꿈을 죽여”
〈악마의 부엌으로 초대합니다〉
울라 마이넥케 지음·윤진희 옮김/한스미디어·1만2000원 <샤이닝>(스탠리 큐브릭ㆍ1980)은 질서와 무질서가 극단에 이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이는 영화다. 전직 교사인 완벽주의자 잭 토런스는 ‘빛나는’ 소설가를 꿈꾸며 미국 콜로라도 두메의 한 호텔로 가족을 데리고 들어간다. 때는 폭설로 바깥과 단절돼 버린 겨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토런스는 스스로를 질서 속에 가두고 어떤 무질서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집착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호텔은 ‘전설의 고향’이었으니, 몇 해 전 관리인이 가족을 잔혹하게 살해한 뒤 자살했다는 풍문이 전해진 것이다. 아들 대니는 아버지의 극단에 서 있다. 만취한 토런스가 팔을 세게 당기는 바람에 어깨가 탈골됐던 경험은 대니를 환상의 세계로 가라앉힌다. 가상의 친구 토니와 대화를 나눈다는 설정이 현실의 질서를 거부하려는 몸짓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질서ㆍ이성과 무질서ㆍ광기, 영화는 두 축을 줄을 타듯 위태롭게 오가며 관객을 내내 공포에 떨게 만든다. 2006년 영국의 한 인터넷 뉴스 사이트는 이 영화를 최고의 공포영화로 꼽기도 했다. 토런스가 아내 웬디를 죽이려 도끼로 방문을 찍어 뜯어낸 뒤 보인 미소는 그 자체 ‘악마의 표정’이다. <악마의 부엌으로 초대합니다>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악마와 거꾸로 친해질 것을 권하는 책이다. 독일에서 음악가로 일하는 지은이는 질서 있는 생활만이 인생의 전부인가라고 물은 뒤 완벽주의와 질서의 세계에서 탈출하자고 말한다. 누구나 삶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창조와 기쁨을 지향하지만 무질서가 지닌 긍정적인 면을 보지 못한다는 얘기다. “언젠가 완벽한 것을 이루겠다는 바람 자체가 꿈이다. 물론 그 꿈이 충족된다면 멋진 일이긴 하지만….” 완벽을 꿈꾸는 완벽주의가 되레 꿈을 죽인다는 말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악마는 우리를 무질서로 끌어당기는 인력, 질서를 흩뜨리고 훼방 놓는 영악한 존재를 가리킨다. 하지만 내면에 살림을 차리고 있는 악마는 영특한 면도 있어 무기력과 실패로 헤매는 이들에게 ‘최후의 순간’에 일을 완수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무질서를 통해 창조적인 삶을 일구는 데 유별난 방편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작품 제출 기한에 쫓기다 무작정 올라탄 야간열차에서 그림을 완성하는 화가, 음악 저작권을 등록하는 마지막 날에 가까울수록 좋은 노래를 만들어내는 작곡가 등 다양한 사람들과 나눈 대화와 일화를 소개하며 자연스럽게 독자를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있다. 다만 지은이의 신변잡기가 지나치게 자주 등장하는 게 흠잡힐 수도 있겠다.
악마의 귀띔 ‘작은 문제를 참사로 만드는 비결’은 특히 눈길을 잡는 대목이다. ‘아, 나도 이렇지’라며 군데군데서 무릎을 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신이 미루고 피하고 차단한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라. 미루고 피했던 흔적을 지우는 기술을 완벽하게 터득하라. 당신에게 참사를 불러일으킨 사람은 그냥 내버려두라.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마라….” 물론 역설적 표현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제아무리 기름진 옥토라도 밤낮없이 태양만 내리쬐면 부스러져 사막이 된다고 했다. 한 뼘 정도 비뚤어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다, 삐걱대는 삶에 윤활유 같은 효험이 있다는 게 지은이의 전언이다. 영화 <샤이닝>에서 토런스가 남긴 수백 쪽짜리 소설 원고는 단 한 문장만 반복돼 있었다. “공부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지은이 식대로라면, 무질서와 질서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새겨진다. 해먹에 누워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울라 마이넥케 지음·윤진희 옮김/한스미디어·1만2000원 <샤이닝>(스탠리 큐브릭ㆍ1980)은 질서와 무질서가 극단에 이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이는 영화다. 전직 교사인 완벽주의자 잭 토런스는 ‘빛나는’ 소설가를 꿈꾸며 미국 콜로라도 두메의 한 호텔로 가족을 데리고 들어간다. 때는 폭설로 바깥과 단절돼 버린 겨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토런스는 스스로를 질서 속에 가두고 어떤 무질서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집착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호텔은 ‘전설의 고향’이었으니, 몇 해 전 관리인이 가족을 잔혹하게 살해한 뒤 자살했다는 풍문이 전해진 것이다. 아들 대니는 아버지의 극단에 서 있다. 만취한 토런스가 팔을 세게 당기는 바람에 어깨가 탈골됐던 경험은 대니를 환상의 세계로 가라앉힌다. 가상의 친구 토니와 대화를 나눈다는 설정이 현실의 질서를 거부하려는 몸짓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질서ㆍ이성과 무질서ㆍ광기, 영화는 두 축을 줄을 타듯 위태롭게 오가며 관객을 내내 공포에 떨게 만든다. 2006년 영국의 한 인터넷 뉴스 사이트는 이 영화를 최고의 공포영화로 꼽기도 했다. 토런스가 아내 웬디를 죽이려 도끼로 방문을 찍어 뜯어낸 뒤 보인 미소는 그 자체 ‘악마의 표정’이다. <악마의 부엌으로 초대합니다>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악마와 거꾸로 친해질 것을 권하는 책이다. 독일에서 음악가로 일하는 지은이는 질서 있는 생활만이 인생의 전부인가라고 물은 뒤 완벽주의와 질서의 세계에서 탈출하자고 말한다. 누구나 삶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창조와 기쁨을 지향하지만 무질서가 지닌 긍정적인 면을 보지 못한다는 얘기다. “언젠가 완벽한 것을 이루겠다는 바람 자체가 꿈이다. 물론 그 꿈이 충족된다면 멋진 일이긴 하지만….” 완벽을 꿈꾸는 완벽주의가 되레 꿈을 죽인다는 말이다.

무질서로 숨쉬고 불완전을 꿈꿔라. 그림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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