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룬의 예술사〉
삶이든 예술이든 중요한 것은 순간
“로마 웅장미는 따분, 로코코는 완벽”
기존 관념 깨고 지성과 유머 곁들여
“로마 웅장미는 따분, 로코코는 완벽”
기존 관념 깨고 지성과 유머 곁들여
〈반룬의 예술사〉
헨드리크 빌렘 반 룬 지음·남경태 옮김/들녘·4만원 열등감이 문제다. 예술을 즐기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예술사조를 한 두름에 꿰고 각 작품에 대한 비평적 지식을 두루 갖추지 못하면 예술을 즐긴다고 남들 앞에 나설 수 없을 것 같은 공포가 예술의 적이다. 그 공포를 극복하려는 이들에게 <반 룬의 예술사>(원제 The Arts)는 좋은 길라잡이다. 숱한 예술사, 미술사 책이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지은이의 지적 과시욕과 연결돼 있다. 그들의 글을 읽노라면 예술을 이해한다는 일은 고차 방정식을 풀거나 화학 원소표를 암기하는 것과 비슷해진다. 이 책은 다르다. 예컨대 “예술은 부엌에서 시작된다”거나 “훌륭한 예술가들은 미학이론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거나 “기막히게 잘 구워진 오믈렛은 몹시 서툰 벽화보다 낫고, 조그마한 테라코타 인형은 산의 바위를 깎아 만든 건국자의 얼굴보다 더 큰 기쁨을 준다”는 문장을 이어붙이면, 예술에 대한 반 룬의 생각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예술은 즐기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삶에 대한 순수한 즐거움, 뭔가 창조할 수 있다는 강렬한 쾌감을 직간접적으로 음미하는 것이다. <… 예술사>에서 반 룬은 이를 귀납적으로 입증한다. 피라미드도 고딕 성당도 인상주의도 모차르트도 당대의 삶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노력과 직결되어 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밝히자면, 이 책은 ‘초보자 입문서’의 꼴을 갖추진 않았다. 이번에 나온 한국어 번역본은 730여 쪽에 이르는 ‘장서’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서양사와 회화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다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와 정보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은 쉽게 읽을 수 있다. 차이는 지은이의 ‘태도’에 있다. “옛 페르시아 필사본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는데 연대 따위가 무슨 상관인가”와 같은 ‘격려’를 독자들에게 계속 건넨다. 이런 태도 위에서 반 룬은 독특한 방식으로 예술사를 헤집었다. 우선 장르 구분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회화·조각·건축 등 전통적인 장르는 물론, 장신구·그릇·옷, 심지어 신발까지 끌어들여 예술의 변천을 종횡무진 짚었다. 연극·오페라·가곡 등도 물론 빼놓지 않았다. 원래 그는 발레·요리·패션까지도 망라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정치인·사상가 등이 각 장르의 명멸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도 함께 설명했다.
예술에 대한 자신의 심미안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라는 것의 실체는 입술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 다 빈치의 시시한 그림 실력 때문이라고 평한다. 프랑스 혁명기의 화가 다비드에 대해선 “회화를 천연색 삽화로 전락시켰다”고 맹비난하고, 고대 로마의 웅장한 건축물에 대해선 “상상력이 완전히 결핍되어 너무나 따분하다”고 혹평한다. 헨델의 습관적 표절을 들추고, 현대(20세기 초)의 추상 예술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런데 그것이 꼬장꼬장하지 않고 유쾌하다. 반 룬은 지성과 유머의 절묘한 배합으로 비난조차 즐겁게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반 룬의 이런 관점은 로코코에 대한 감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귀족계층의 퇴폐를 대표하는 사조로 여겨지는 로코코에 대해 “예술의 가장 고결하고 궁극적인 임무가 생활에 기여하는 데 있다면, 로코코 예술은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완벽한 예술이었다”고 평한다. 로코코의 본질은 건축이나 회화가 아니라 실내장식에 있는데, 친밀한 삶을 연출하기 위해 섬세한 벽장식과 식기를 만들어낸 것을 높이 쳤다. 다만 ‘생활에 대한 로코코의 기여’가 소수 특권계층에 집중된 것이 비극이었다고 덧붙인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신화를 부정한다. 동시에 ‘예술의 정치도구화’도 비판한다. 예술이 대중화될 수 있다는 신념 역시 비판했다. 이렇게 예술에 대한 기존 관념을 모두 베어내고 반 룬은 하나의 버팀목을 잡는다. “예술도 인생처럼 덧없다. 과거의 예술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아름다움과 행복을 전한 것으로 소임을 다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티끌로 돌아가는 게 이치다. 삶에서나 예술에서나 중요한 것은 순간이다.” <… 예술사>를 읽는, 흥미로운 포인트가 두 가지 있다. 이 책은 1937년에 처음 출간됐다. 2차 대전 직전의 불길한 기운이 세계를 휘감을 때다. 로마의 웅장한 숭고미를 멀리하고, 로코코의 세심한 화려미를 좋아했던 이 지적인 탐미주의자가 전쟁에 대한 경고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반 룬은 역사가인 동시에 기자였다. 1차 대전을 전후해 <에이피>(AP) 통신의 특파원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저널리즘의 어연번듯한 글쓰기가 이 책에 있다. 복잡한 사실을 명쾌하게 전달하면서도 그 안에 비평의 심지를 꽂아넣었다. ‘인간에 대한 관심’도 역사학자보다는 기자의 본성에 더 이끌린 결과인 듯하다. 2000년에 처음으로 한국어 번역본이 나왔는데, 이번에 전문 번역가 남경태씨가 원전을 더욱 충실히 번역해 개정판을 새로 내게 됐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반 룬은 누구? ‘인간’에 방점을 둔 코즈모폴리턴 반 룬(1882~1944)은 전천후 지식인이자 코스모폴리탄이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으며,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에이피> 통신의 워싱턴, 바르샤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1차 대전 이후,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30여권의 저술을 펴냈다. 풍자를 곁들인 명쾌한 글쓰기로 해박한 지식과 독특한 안목을 드러내는 그의 책은 ‘인문주의자’를 꿈꾸는 많은 이들로부터 환영받았다. 국내에서는 도서출판 서해문집이 2005년부터 <발명 이야기> <코끼리에 관한 짧은 우화> <관용> 등을 ‘반룬 전집 시리즈’로 묶어 내면서 본격 소개됐다. 이후에도 서해문집은 <인류이야기:위대한 인류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시몬 볼리바르: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등의 반 룬 저술을 펴냈다. 그밖에 <명화로 보는 반 룬의 성서 이야기>(생각의나무), <배 이야기: 인간은 어떻게 7대양을 항해했을까>(아이필드) 등이 번역 출간돼 있다. 역사는 물론 문학까지 아우르며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그의 책을 가로지르는 특징이 있다. 사건이 아니라 인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자세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헨드리크 빌렘 반 룬 지음·남경태 옮김/들녘·4만원 열등감이 문제다. 예술을 즐기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예술사조를 한 두름에 꿰고 각 작품에 대한 비평적 지식을 두루 갖추지 못하면 예술을 즐긴다고 남들 앞에 나설 수 없을 것 같은 공포가 예술의 적이다. 그 공포를 극복하려는 이들에게 <반 룬의 예술사>(원제 The Arts)는 좋은 길라잡이다. 숱한 예술사, 미술사 책이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지은이의 지적 과시욕과 연결돼 있다. 그들의 글을 읽노라면 예술을 이해한다는 일은 고차 방정식을 풀거나 화학 원소표를 암기하는 것과 비슷해진다. 이 책은 다르다. 예컨대 “예술은 부엌에서 시작된다”거나 “훌륭한 예술가들은 미학이론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거나 “기막히게 잘 구워진 오믈렛은 몹시 서툰 벽화보다 낫고, 조그마한 테라코타 인형은 산의 바위를 깎아 만든 건국자의 얼굴보다 더 큰 기쁨을 준다”는 문장을 이어붙이면, 예술에 대한 반 룬의 생각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예술은 즐기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삶에 대한 순수한 즐거움, 뭔가 창조할 수 있다는 강렬한 쾌감을 직간접적으로 음미하는 것이다. <… 예술사>에서 반 룬은 이를 귀납적으로 입증한다. 피라미드도 고딕 성당도 인상주의도 모차르트도 당대의 삶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노력과 직결되어 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밝히자면, 이 책은 ‘초보자 입문서’의 꼴을 갖추진 않았다. 이번에 나온 한국어 번역본은 730여 쪽에 이르는 ‘장서’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서양사와 회화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다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와 정보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은 쉽게 읽을 수 있다. 차이는 지은이의 ‘태도’에 있다. “옛 페르시아 필사본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는데 연대 따위가 무슨 상관인가”와 같은 ‘격려’를 독자들에게 계속 건넨다. 이런 태도 위에서 반 룬은 독특한 방식으로 예술사를 헤집었다. 우선 장르 구분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회화·조각·건축 등 전통적인 장르는 물론, 장신구·그릇·옷, 심지어 신발까지 끌어들여 예술의 변천을 종횡무진 짚었다. 연극·오페라·가곡 등도 물론 빼놓지 않았다. 원래 그는 발레·요리·패션까지도 망라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정치인·사상가 등이 각 장르의 명멸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도 함께 설명했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 사진 들녘 제공.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신화를 부정한다. 동시에 ‘예술의 정치도구화’도 비판한다. 예술이 대중화될 수 있다는 신념 역시 비판했다. 이렇게 예술에 대한 기존 관념을 모두 베어내고 반 룬은 하나의 버팀목을 잡는다. “예술도 인생처럼 덧없다. 과거의 예술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아름다움과 행복을 전한 것으로 소임을 다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티끌로 돌아가는 게 이치다. 삶에서나 예술에서나 중요한 것은 순간이다.” <… 예술사>를 읽는, 흥미로운 포인트가 두 가지 있다. 이 책은 1937년에 처음 출간됐다. 2차 대전 직전의 불길한 기운이 세계를 휘감을 때다. 로마의 웅장한 숭고미를 멀리하고, 로코코의 세심한 화려미를 좋아했던 이 지적인 탐미주의자가 전쟁에 대한 경고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반 룬은 역사가인 동시에 기자였다. 1차 대전을 전후해 <에이피>(AP) 통신의 특파원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저널리즘의 어연번듯한 글쓰기가 이 책에 있다. 복잡한 사실을 명쾌하게 전달하면서도 그 안에 비평의 심지를 꽂아넣었다. ‘인간에 대한 관심’도 역사학자보다는 기자의 본성에 더 이끌린 결과인 듯하다. 2000년에 처음으로 한국어 번역본이 나왔는데, 이번에 전문 번역가 남경태씨가 원전을 더욱 충실히 번역해 개정판을 새로 내게 됐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반 룬은 누구? ‘인간’에 방점을 둔 코즈모폴리턴 반 룬(1882~1944)은 전천후 지식인이자 코스모폴리탄이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으며,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에이피> 통신의 워싱턴, 바르샤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1차 대전 이후,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30여권의 저술을 펴냈다. 풍자를 곁들인 명쾌한 글쓰기로 해박한 지식과 독특한 안목을 드러내는 그의 책은 ‘인문주의자’를 꿈꾸는 많은 이들로부터 환영받았다. 국내에서는 도서출판 서해문집이 2005년부터 <발명 이야기> <코끼리에 관한 짧은 우화> <관용> 등을 ‘반룬 전집 시리즈’로 묶어 내면서 본격 소개됐다. 이후에도 서해문집은 <인류이야기:위대한 인류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시몬 볼리바르: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등의 반 룬 저술을 펴냈다. 그밖에 <명화로 보는 반 룬의 성서 이야기>(생각의나무), <배 이야기: 인간은 어떻게 7대양을 항해했을까>(아이필드) 등이 번역 출간돼 있다. 역사는 물론 문학까지 아우르며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그의 책을 가로지르는 특징이 있다. 사건이 아니라 인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자세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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