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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빈 라덴 인터뷰 ‘킬’된 까닭은…

등록 2005-05-26 19:41

 배드 뉴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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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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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마 누구라구?”

지금은 미국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돼버린 오사마 빈 라덴. 그러나 2001년 9·11 동시다발테러 전만 해도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언론사 간부들도 그랬다. 중동의 테러 관련기사에서 오사마 빈 라덴의 이름이 나오면 편집자가 그 이름을 지워버렸다. 워낙 비슷비슷한 이름이 많아 시청자들이 헷갈리까봐서였다. “그가 엄청난 테러를 저지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라고 말한다면 면피가 될 수 있을까.

지난 3월 나온 톰 펜턴의 <배드 뉴스(Bad News)>는 이 점을 파고든다. 왜 미국 언론들은 9·11을 미리 내다보는 데 실패했을까. 그건 언론의 영역을 뛰어넘는 문제였을까. 아니면 언론이 게을러서인가. 앞으로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1997년 말 ‘난데 없이’ 외환위기가 닥치자 모든 언론이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외환위기는 갑자기 찾아온 게 아니다. 분명한 전조가 있었다. 다만 언론은 그걸 국민에게 알리는 데 실패했다. 외면했다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른다. “그런 우울한 소식을 전해서 독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이 책에 나오는 <시비에스방송> 뉴스 편집자의 말이다.

펜턴은 40년 가까이 미국의 대표적 공중파인 <시비에스방송> 국제 전문기자로 활약하다 최근 은퇴했다. 이 책은 그의 기자생활의 정리다. 그러나 단순한 회고가 아니다. <시비에스방송>이 중요한 국제뉴스들을 어떻게 외면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팬턴은 “나는 내 직업을 헐뜯기 위해서, 또 나에게 세계적 사건의 최전선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해줬던 회사의 명예를 손상시키기 위해 이 책을 쓴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이 책은 <시비에스>를 비롯한 미국 주류언론이 무엇을, 왜 실패했는지를 보여주려는 기록이다.

1996년 런던지국에서 일하던 팬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망명객을 통해서 당시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오사마 빈 라덴을 인터뷰할 기회를 얻는다. 미국 언론 가운데선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본사에서 ‘킬’(기사나 취재계획을 버리는 것)된다. “빈 라덴은 미국을 공격하려는 테러리스트 조직을 이끌고 있다”는 팬턴 팀의 주장도 허사였다. “간부들은 빈 라덴을 미국 시청자의 관심을 끌 수 없는 아랍인으로 봤다. 더구나 예산을 절약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뒀다”고 펜턴은 적었다.

펜턴은 그뒤 빈 라덴을 만났던 어느 아랍 언론인을 인터뷰했다. 그 언론인의 입을 통해 빈 라덴의 미국 증오와 테러 열망을 기사에 담았다. 그러나 정작 <시비에스 저녁뉴스>에서 빈 라덴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외국인 이름이 너무 많이 나와서 빈 라덴의 이름은 빼버린 것이다.

펜턴의 은퇴는 공교롭게도 <시비에스 저녁뉴스>의 간판 앵커 댄 래더의 은퇴와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 뉴스의 위기는 곧 앵커시대의 마감과 궤를 같이 한다. 1960~80년대 미국민들은 주로 공중파 저녁뉴스에서 정보를 얻었다. 비판의식과 폭넓은 안목을 가진 앵커들이 뉴스를 선별했다. 전설적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가 1968년 베트남에서 “이 전쟁은 더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고 리포트했을 때 미국민들은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승리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저녁뉴스는 내리막길이다. 대중은 그 대신 <시엔엔> <폭스뉴스> <엠에스엔비시>와 같은 24시간 뉴스전문 채널과 ‘러시 림보’ 같은 라디오 토크쇼를 보고 듣는다. 펜턴은 이것들이 뉴스를 오염시킨다고 비판한다. 새로운 미디어들은 “발굴보도를 하거나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미국민들에게 알리기 보다는 코멘트와 정치적 공격에 더 열중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에겐 댄 래더의 은퇴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보도하는 전통적 저널리즘도 함께 퇴장하는 것으로 비쳐진다.

방송사 고위간부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청자들은 더이상 ‘하드 뉴스’(무거운 주제의 뉴스)를 원하지 않는다. 미국 시청자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와 다른 내용의 기사는 소화할 수가 없다.” 대중의 구미에 맞는 말랑말랑한 기사들, 마이클 잭슨의 재판이나 재닛 잭슨의 젖가슴 소식처럼 연성화한 기사들이 뉴스채널과 인터넷을 장악한다. 그래야 돈을 벌 수 있다. 팬턴은 지난해 미국 대선을 돌아보며, 언론의 정치적 편향보다 이게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뉴스의 연성화’가 치러야할 대가는 크다. 9·11이 단적인 예다. 미국민들이 세계를 자기 눈으로만 보는 동안, 이슬람권의 적대감이 얼마나 큰지 그들이 왜 적대감을 갖는지를 지나쳤다. 댄 래더는 은퇴 직전 팬턴에게 “9·11 직후에 국제뉴스를 강화했어야 했는데 우리는 그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다. 미국 주요신문 중 국제뉴스를 앞면에 배치하는 건 <뉴욕타임스>가 거의 유일하다.

팬턴은 이런 말로 책을 끝낸다. “나는 세계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언론 기업주들이 그들의 (뉴스선택) 기준을 향상시키도록 맞서자’고 제안한다. 미국은 뉴스를 다루는 이들에게 더 많은, 더 좋은 뉴스를 공급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 모두의 생명을 구하는 길일지 모른다.” 뉴스가 오락이 되는 시대에 이게 가능할까 싶다. 그러나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의 시청자(독자)들 모두 한번쯤 되새겨 볼만한 가치는 있는 것 같다. 워싱턴/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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