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초승달 동맹〉
〈십자가 초승달 동맹〉
이언 아몬드 지음·최파일 옮김/미지북스·1만6000원 1453년 5월28일은 월요일이었다. 그날 비잔티움 제국의 천년 고도 콘스탄티노플의 날씨는 청명했고,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잔잔하게 전사들의 피부를 감싸고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이 도시를 둘러싼 8만여명의 오스만튀르크 제국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튿날인 새벽 1시 반께 포진을 마치자, 스물한살의 젊은 술탄 메메트 2세는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지축을 흔드는 커다란 함성과 함께 튀르크 전사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 공격으로 1천여년 동안 유럽의 수많은 문인들에게 ‘제2의 로마’라는 찬사를 받아온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수도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날은 많은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기독교도의 성지가 야만적인 이슬람인들에게 짓밟힌 치욕의 날로 기록되고 있다. 이언 아몬드 미국 애틀랜타 조지아주립대학 교수는 <십자가 초승달 동맹-우리가 알지 못했던 기독교·이슬람 연합 전쟁사>에서 유럽인들의 이런 기억은 ‘단순한 허구’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11세기 스페인과 15세기의 콘스탄티노플, 19세기의 크림반도에 이르기까지 서양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는 서로 상대의 지역에서 싸웠던 수많은 ‘배반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성안에 남아 있던 ‘무기를 들 수 있는 남자’는 그리스인 4983명, 외국인 2000명이었다. 그 외국인 가운데는 술탄 메메트 2세와 제위를 놓고 싸웠던 무슬림 오르한 공도 끼어 있었다. 그와 무슬림 전사들은 도시 방어의 가장 결정적인 구역인 해안 성벽을 맡아 바다 쪽에서 쳐들어오는 오스만의 공격을 견고하게 막아냈다. 반대쪽도 마찬가지였다. 무슬림 신하 할릴 파샤가 기독교도에 대한 동정심을 품고 술탄 메메트 2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쓴 데 반해,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딸을 술탄과 결혼시킨 자가노스 파샤라는 그리스인은 호전적으로 침공을 주장했다. 오스만튀르크의 비정규 용병들은 대개 헝가리, 이탈리아, 슬라브와 같은 기독교 국가 출신이었다. 이들은 전투 초반 전위부대에 끼어 도시의 성벽을 처음으로 기어오르게 된다. 22.5㎞에 이르는 난공불락의 성벽을 무너뜨린 대포 설계자도 우르반이라는 기독교인이었다. 사람들이 반대쪽에서 싸운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중세인들은 대부분 종교적 신념보다 정치적·경제적 이해를 따랐다. 일부 사람들은 혈연으로 엮여 있거나 상대에 대해 진지한 호의를 품기도 했다. 십자가(기독교)와 초승달(이슬람) 사이의 충돌은 파란 눈동자에 노란 머리를 한 이탈리아 청년들과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터키 청년들의 월드컵 국가대표 대항전이라기보다는 터키인 스트라이커를 앞세운 인터밀란(이탈리아 프로축구팀)과 이탈리아인 수비수를 사들인 갈라타사라이(터키 프로축구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의 분위기와 비슷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왜 ‘선량한 기독교인과 야만적인 이슬람’이라는 신화는 계속되고 있을까. 이슬람에 대한 공포를 동원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다른 종파를 박해하며, 외국을 침략한 기독교인 스스로의 추악함을 감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그 때문에 “이슬람, 기독교권, 이교도, 튀르크와 같은 단어들의 사용을 포기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날을 세운다. 이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과감히 비판할 수 있는 열린 자세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이언 아몬드 지음·최파일 옮김/미지북스·1만6000원 1453년 5월28일은 월요일이었다. 그날 비잔티움 제국의 천년 고도 콘스탄티노플의 날씨는 청명했고,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잔잔하게 전사들의 피부를 감싸고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이 도시를 둘러싼 8만여명의 오스만튀르크 제국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튿날인 새벽 1시 반께 포진을 마치자, 스물한살의 젊은 술탄 메메트 2세는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지축을 흔드는 커다란 함성과 함께 튀르크 전사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 공격으로 1천여년 동안 유럽의 수많은 문인들에게 ‘제2의 로마’라는 찬사를 받아온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수도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날은 많은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기독교도의 성지가 야만적인 이슬람인들에게 짓밟힌 치욕의 날로 기록되고 있다. 이언 아몬드 미국 애틀랜타 조지아주립대학 교수는 <십자가 초승달 동맹-우리가 알지 못했던 기독교·이슬람 연합 전쟁사>에서 유럽인들의 이런 기억은 ‘단순한 허구’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11세기 스페인과 15세기의 콘스탄티노플, 19세기의 크림반도에 이르기까지 서양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는 서로 상대의 지역에서 싸웠던 수많은 ‘배반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성안에 남아 있던 ‘무기를 들 수 있는 남자’는 그리스인 4983명, 외국인 2000명이었다. 그 외국인 가운데는 술탄 메메트 2세와 제위를 놓고 싸웠던 무슬림 오르한 공도 끼어 있었다. 그와 무슬림 전사들은 도시 방어의 가장 결정적인 구역인 해안 성벽을 맡아 바다 쪽에서 쳐들어오는 오스만의 공격을 견고하게 막아냈다. 반대쪽도 마찬가지였다. 무슬림 신하 할릴 파샤가 기독교도에 대한 동정심을 품고 술탄 메메트 2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쓴 데 반해,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딸을 술탄과 결혼시킨 자가노스 파샤라는 그리스인은 호전적으로 침공을 주장했다. 오스만튀르크의 비정규 용병들은 대개 헝가리, 이탈리아, 슬라브와 같은 기독교 국가 출신이었다. 이들은 전투 초반 전위부대에 끼어 도시의 성벽을 처음으로 기어오르게 된다. 22.5㎞에 이르는 난공불락의 성벽을 무너뜨린 대포 설계자도 우르반이라는 기독교인이었다. 사람들이 반대쪽에서 싸운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중세인들은 대부분 종교적 신념보다 정치적·경제적 이해를 따랐다. 일부 사람들은 혈연으로 엮여 있거나 상대에 대해 진지한 호의를 품기도 했다. 십자가(기독교)와 초승달(이슬람) 사이의 충돌은 파란 눈동자에 노란 머리를 한 이탈리아 청년들과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터키 청년들의 월드컵 국가대표 대항전이라기보다는 터키인 스트라이커를 앞세운 인터밀란(이탈리아 프로축구팀)과 이탈리아인 수비수를 사들인 갈라타사라이(터키 프로축구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의 분위기와 비슷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왜 ‘선량한 기독교인과 야만적인 이슬람’이라는 신화는 계속되고 있을까. 이슬람에 대한 공포를 동원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다른 종파를 박해하며, 외국을 침략한 기독교인 스스로의 추악함을 감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그 때문에 “이슬람, 기독교권, 이교도, 튀르크와 같은 단어들의 사용을 포기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날을 세운다. 이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과감히 비판할 수 있는 열린 자세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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