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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20대 청년백수가 불량제품?
‘사용 설명서’ 제대로 읽어봐

등록 2011-07-15 20:47

전석순(28)
전석순(28)
무능력한 사람은 망가진 선풍기
인턴십은 ‘체험 사용기간’ 표현
‘물화 이데올로기’ 반어적 야유
〈철수 사용 설명서〉
〈철수 사용 설명서〉
〈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민음사·1만1000원

지난 1일 저녁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작가 박범신의 소설 <내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출판기념회 겸 정년퇴임 기념식은 의미 있고 따뜻한 자리였다. 이날 행사에서 눈길을 끈 것 중 하나는 박범신이 손수 서명한 책을 두 제자에게 증정하는 차례였다. 그 두 제자는 김현영과 전석순. 그가 1991년 명지대 문창과 교수로 부임한 뒤 문단에 내보낸 50여 명의 ‘작가 제자’ 중 첫 번째와 마지막에 해당하는 이들이다. 새로 나온 <철수 사용 설명서>는 바로 그 전석순(28·사진)의 소설로, 올해 ‘오늘의작가상’ 수상작이다.

제목부터가 파격을 넘어 도발적이기까지 한 이 소설은 스물아홉 살 청년 철수의 삶을 가전제품 사용설명서 형식에 담아 전한다. 대한민국의 평균적 청년 철수가 취업과 연애, 가족관계 등에서 실패를 거듭하며 ‘루저’(패배자)로 내몰리지만, 그런 딱지가 과연 온당한 것인지를 작가는 따져 묻는다.

“주변에서는 체험 사용 기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철수를 대할 때마다 빨래를 하지 못하는 세탁기나 바람이 나오지 않는 선풍기 보듯 했다. 철수는 아버지에게 고장은 났지만 버릴 수도 없는, 어디에 써야 할지 막막한 물건이었다.”

인간을 물건 취급하는 물화(物化)의 논리는 제목과 형식에서뿐만 아니라 문장의 비유 차원에서도 철저히 관철된다. 기업의 인턴십을 ‘체험 사용 기간’으로 표현한다든가 무능력한 사람을 망가진 세탁기나 선풍기에 견주는 데에서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물화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어적 야유가 도드라진다. “철수는 늘 충전 중이었다”거나 “철수보다 기능이 떨어지는 제품은 없는 듯했다”와 같은 문장들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 가까이 취직을 하지 못하는 철수는 이 시대 대한민국 청년의 표준에 해당한다. 그가 보기에 회사가 요구하는 ‘스펙’은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것이었는데도 언제부턴가 그 기준에 맞춰 입사하는 이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고, 어느새 그게 표준으로 자리잡는다.(그러나 “그게 진짜 표준이기는 한 걸까.”) 그러다 보니 그에 미치지 못하는 스펙의 소유자인 철수는 자연스레 루저로 분류되기에 이른다. 평범과 표준을 열등과 미달로 간주하는 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철수의 수난과 실패는 연애와 가족관계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소극적이며 우유부단한 성격에다 긴장하면 온몸이 뜨거워지는 증상을 보이는 그는 사랑하는 ‘그녀’와 결정적인 단계에 접어들 때마다 실수와 패착을 거듭한다. 그녀들은 때론 상반되는 이유를 들며 철수를 떠나간다.

부모 및 친척들과의 관계 역시 원만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철수가 보기에 문제는 회사와 그녀들과 가족들 모두 철수 자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는 자신의 ‘제품 사양’과 특성, 관리 요령, 주의할 점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사용 설명서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철수가 불량품이 되지 않을 방법은 딱 하나, 사용 설명서를 만드는 것뿐이다.”


여기서, 사용 설명서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 물화에 대한 비판과 야유는 사뭇 방향을 튼다. 이제 사용 설명서는 외양과 편견에 휘둘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한 인간을 대할 수 있게 하는 이해와 소통의 도구가 된다. “누군가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필요한 모습이 아니라, 심지어 철수가 되고 싶은 모습도 아니라, 진짜 철수가 어떤 제품인지, 바로 그것을 알아야만 했다.”

<철수 사용 설명서>는 ‘제품 규격 및 사양’ ‘취업 모드’ ‘연애 모드’ ‘설치 방법’ ‘주의 사항’ ‘제품 보증서’ 같은 장별 제목 아래 철수가 자신의 사용 설명서를 작성하는 과정을 얼개로 삼는다. 남들이 강요하는 기준과 관점에 따르면 “어떻게 해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불량품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철수가 스스로 자신의 사양과 특성을 정확히 제시함으로써 자신이 불량이나 고장이 아닌 ‘온전한 제품’이라는 사실을 석명하는 것이다. 게다가, 타인들의 이해에 앞서 자신부터가 스스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사용 설명서를 작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인상적인 결론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철수는 깨닫는다. “철수 사용 설명서를 쓸 수 있는 사람도, 그걸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사람도 결국은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 소설을 쓰느라 거의 모든 종류의 설명서를 다 읽어 보았다”는 작가는 “두 번째 소설로 ‘영희 사용 설명서’를 쓰라는 주변의 권유가 많다”고 웃으며 말했다.

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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