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죽산 조봉암이 재판정에서 자료를 검토하고 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간첩 혐의 등으로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담배 한대와 술 한잔을 청했지만 거부당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008년 후손들은 재심을 청구했고, 2011년 1월 대법원은 대법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한길사 제공
이원규 지음/한길사·2만2000원 사법살인당한 비운의 정치인
정치역정 이면엔 인간적 면모
딸과 영화 보는 아버지이기도 장관 인사철마다 이따금 등장하는 단골 이슈는 우리나라 정치 엘리트들의 농지 불법 취득 의혹이다. 1949년 6월21일 제정된 대한민국 ‘농지개혁법’은 농사를 짓는 자만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의 원칙을 확립한 것이기에, 권력을 쥔 자들이 투기 목적으로 농지를 사기 위해 시골로 주소지를 옮겼다가 다시 서울로 되돌아오는 관행은 그 자체로 농지법과 주민등록법을 위반한 것이 된다. 이 법을 통해 단군 이래 수천년 동안 이어진 소작제를 철폐하고, 토지개혁을 시행한 인물이 바로 ‘비운의 정치인’ 죽산 조봉암(1898~ 1959)이다. 조봉암은 <약산 김원봉>(2005년)과 <김산 평전>(2006년)을 통해 잊혀진 혁명가들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은 작가 이원규씨가 도달한 또하나의 큰 산이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죽산을 “평화와 정의의 씨를 뿌리고 간 순교자”라고 부르며 “마지막 평전으로 죽산을 쓸 것이라 다짐했었고, 더 이상 책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모든 힘을 여기 쏟았”다고 밝히고 있다. 결기 어린 그의 말처럼 책 뒤편에 붙은 10쪽이 넘는 참고자료 목록과 죽산의 주변인들의 인터뷰 기록을 보면, 저자가 책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죽산이었을까. 그가 처음 다룬 김원봉은 약관의 나이에 의열단을 이끌며 빛나는 항일 경력을 쌓았음에도 해방과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는 비극 속에서 잊혀진 인물이 되어 버렸고, 김산은 님 웨일스의 <아리랑>을 통해 하나의 완성된 신화로 남았으나 중국 대륙이라는 커다란 바닷속에서 형체를 알아 보기 어렵게 녹아버리고 말았다. 이에 견줘 죽산은 권력욕에 눈이 먼 이승만에게 ‘사법 살인’을 당하지만, 그가 뿌리 내린 농지법의 정신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관철되고 있으며, 그가 주장한 평화통일론과 사회민주주의는 이제 한국 사회의 주류 담론의 지위에 올라서 있다. 조봉암은 죽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완성해 냈기에 앞의 김원봉이나 김산의 죽음에서 묻어나는 허무함이나 무참함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훨씬 덜하다. 그래서 조봉암은 앞서 두개의 비극을 다루고 난 저자가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자연스런 귀착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서 알 수 있듯 조봉암의 출생에서부터, 한 사람의 공산주의자로 성장해 가는 청년기의 궤적, 그리고 모스크바-만주-상하이를 오갔던 항일 경력, 해방 이후 공산주의와 결별한 뒤 거물 정치인으로 떠오르는 과정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상하이파-이르쿠츠크파로 나뉘었던 조선공산당(조공)의 파벌 투쟁이나, 1·2·3차에 이르는 조공의 결성과 궤멸, 해방 이후 혼란스런 정치 격변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는 이 책을 전문 연구자들의 난해한 논문과 구별 짓는 가장 큰 장점이다. 책의 백미는 후손들이 추억하는 조봉암의 인간적인 면모이다. 조봉암은 언변이 뛰어나고 조직 장악력이 강해 토론 모임에서 늘 중심을 잡았고, 큰딸과 영화 구경 가는 것을 좋아해 슬픈 영화를 보며 자주 눈물짓기도 했다. 여기서 자세히 언급하긴 곤란하지만, 간단치 않았던 그의 여성 편력과 그것이 이후 정치 역정에 드리운 그늘을 엿보는 것도 흥미롭다. 젊은 시절 조봉암은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상하이 시절 저지른 ‘실수’로 인해 공산당 주류로부터 배척당한 뒤 전향을 선언하고 사회민주주의자가 됐다. 그래서 1956년 대선 때 30%의 득표율(개표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을 고려한다면 실제 득표율은 더 높았을 것이다)을 기록할 수 있었다. 이는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어떤 진보정당도 넘지 못한 ‘넘사벽’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이념의 순결을 지켜 공산주의자로 남았다면, 야심이 없는 담백한 인물이었다면, 그가 한국 사회에서 누리고 있는 지금과 같은 독특한 지위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적잖은 잘못, 실책, 판단 착오를 저지른 인물이었고, 결국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지은이는 조봉암을 통해 다른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이 ‘아이러니’의 비릿함이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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