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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등록 2013-07-26 20:23수정 2013-07-26 21:40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리뷰&프리뷰 정희진의 어떤 메모
<글쓰기 홈스쿨>, 고경태, 고준석, 고은서 지음
한겨레출판, 2011
사자성어 말하기가 유행한 적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 두 개를 말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인생관, 두 번째는 연애관이라고 한다. 심심풀이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상대방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적중(?)하는 재미와 ‘자부심’ 때문에 나는 이 놀이에 중독되었다. 한창 먹을 것에 몰두하던 딸아이는 진수성찬·산해진미, 산만 발랄한 친구는 중구난방·자유분방, 정의감이 넘치는 친구는 사필귀정·권선징악. 하지만 대부분은 슬펐다. 사면초가, 무색무취, 첩첩산중, 오리무중, 자포자기…네 글자가 자기를 말하고 있었다.

<글쓰기 홈스쿨>은 작가인 아빠와 초등학생, 중학생 남매의 글쓰기 수업이다. 홈스쿨링도 쉬운 일이 아닌데, 글쓰기다. 대한민국에 이런 아빠가 얼마나 될까마는 그래서 이 책이 좋은 것 같다. 글쓰기가 전업이 아닌 어른들을 대신할 수 있으니까. 쉽고 재미있어서 어린이가 독학하기에도 좋다. 수강생 눈높이에 맞추다 보니 ‘유치’하고 웃기는 장면도 있지만 그것은 내 문제.

언어는 행위이고 은유는 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남의 시를 빌려 말하면, 우리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것은 의미 없는 존재지만,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특별한 의미가 된다. 이름 짓기는 결국 “~ 이다”. 언어는 언제나 “A는 B다”. 사전이 이 서술 구조다. 그런데 B도 고정 불멸의 개념은 아니므로(‘화이트’는 지우개? 생리대? 흰색?) 이때 A도 흔들리게 된다. 직유일 때 좀 더 흔들리고 은유일 때 멀리 간다. 원래는 은유는 먼 것이지만 의미가 되면 가까워진다.

그러니 은유에 매료되는 것은 당연하다. 은유는 상상력과 새로움의 원천이다. 은유하는 능력은 이미 재현된 현실과 다른 차원의 시각과 감수성을 요구한다. 인간의 매력은 말과 글을 따른다. 학력과 계층과 무관하게 10분만 말하는 태도와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은유(meta/phor)는 해석자가 개념을 상상한다. 기존 개념은 이동하고 여러 가지로 분화한다. 전이(轉移), 전의(轉意, 轉義)다. 은유를 잘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비교적 간단한데, 일단 박식해야 한다. 아는 단어가 3개인 사람과 30개인 사람의 언어가 같을 수 없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콜론타이냐” 이 말이 소통되려면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레닌의 갈등을 알아야 한다. “오키나와와 미야코지마의 관계가 제주도랑 추자도랑 비슷한 거야?”(비슷하지 않다) 이 말 역시 네 지역의 역사를 알아야 대화가 가능하다.

또 하나는 정치적 입장이다. 은유는 특정 세계관 안에서만 작동한다. 대개 지식이 지배 도구인 이유는 “여자치고는”, “남자 못지않은”처럼 인종, 성별, 장애로 서술하기 때문이다. “학력 위조를 커밍아웃하라”는 신문 기사가 있어서 놀란 적이 있다. 학력 위조는 도덕, 실정법 위반이므로 자수하고 위조로 얻은 기득권을 소급해서 반납해야지, 커밍아웃? 학력 위조는 ‘죄’고 동성애는 정체성이다.

“내 마음은 호수”만한 사례도 없다. 이 말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적당한 크기의 맑고 고요한 호수여야 한다. 한반도의 1.5배가 넘는 호수거나 녹조에 악취가 진동하는 호수가 연상되면 내 마음은 뭐가 되겠는가. 은유의 대상이 되는 말(‘호수’, 성별, 지역…)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이 사회운동이다. 그러면 다른 언어도 변하기 때문이다. 나는 ‘개새끼’, ‘인간쓰레기’라는 말을 매우 싫어한다. 개뿐 아니라 동물보다 나은 인간은 없고 쓰레기는 자원이다. 개와 쓰레기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깨지면 이 말은 의미를 잃는다.

나의 장광설이 민망하다. 이 책은 은유의 본질과 이동의 역사를 쉽게 설명한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길으면 기차…비행기는 높고…높으면 백두산”(331쪽). 결국 원숭이는 백두산. 이 오랜 구전 동요가 은유의 모범이다. 원숭이 다음에 사과가 녹색이면(아오리, 국광), 수입 바나나가 맛있는 과일이 아니라면, 원숭이는 백두산이 될 수 없다. 좋은 글쓰기 책은 좋은 예를 든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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